[촛불은 평화다]
역사상 최초로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 일어난 폭력·비폭력 논쟁… 비폭력 직접행동, 가장 끈질긴 저항을 보여주다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촛불은 평화다.
평화가 아니라면 촛불은 애당초 켜지지 않았다. 촛불은 ‘밥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켜졌다.
밥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촛불은 거리의 평화를 지켰다.
2008년 촛불의 거리에서 가장 간절한 외침은 어쩌면 “비폭력! 비폭력!”. 무장한 공권력을 향해서 우리도 너희를 때리지 않을 테니 너희도 우리를 해하지 말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호소했다.
전경의 방패에 맞아서 흥분한 누군가 전경을 끌어내 폭력을 휘두르려 하면 자신의 몸을 던져서 전경을 감싸안은 것도 또 다른 촛불이었다.
대열에서 끌려나온 전경을 시위대 뒤편에 조용히 앉히고 담배를 권한 이들도 촛불이었다.
전경차에 불을 지르려는 사람을 경찰에게 인도한 것도 촛불이었다.
촛불문화제 60여 일, 촛불은 평화를 깨뜨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21세기 도덕적 우위는 비폭력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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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간디’로 등장한 신부님들
끝없는 철조망 같은 광화문 차벽 앞에서 촛불은 절망했다.
6월10일 전국에 주최 쪽 추산 100만 촛불이 모였지만 차벽 너머의 청와대는 묵묵부답, 오히려 사과를 뒤집어 촛불을 폭력으로 대했다.
차벽이란 거대한 폭력 앞에서 촛불은 저항에 나섰다.
‘국민 MT’를 하던 시민은 전경차의 바퀴에 밧줄을 묶고 힘을 모아 국민 줄다리기를 시도했다.
김정아 인권재단 ‘사람’ 활동가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차벽의 폭력을 넘어서는 시도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꼬투리가 되었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은 촛불이 폭력으로 변질됐다고 매도했다.
그들은 수만 명, 수십만 명 가운데 수십 명도 되지 않는 이들의 돌출 행동을 마치 전부인 양 부각했다.
그래서 촛불은 꼬투리마저 자르기로 결심했다.
이승호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은 “폭력의 99%는 경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시위 참가자라면 알지만, 하마터면 촛불이 흥분해 정부의 의도에 넘어갈 뻔한 순간에 종교인들이 나타났다”고 돌이켰다.
그리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집단적 간디’로 등장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지지자들이 모인 ‘전쟁 없는 세상’의 임재성 활동가는 “비폭력 직접 행동엔 구심이 필요하다”며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마틴 루서 킹 목사처럼 존경받는 지도자의 간절한 호소가 필요한 시점에 사제단이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매도당해 외로웠던 촛불들은 사제단에 위로를 얻었다.
비가 흩뿌렸던 7월2일 서울시청 앞 광장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이광석(45)씨는 “신부님이 ‘외로우셨죠?’ 말하는 순간에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며 “신부님의 말씀이 나에게 성찰의 기회가 되어서 우리가 무엇을 향해 왜 싸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강영숙(50)씨도 “종교인의 등장으로 정부는 명분을 잃었다”며 “우리가 이렇게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어떻게 계속 폭력으로 나오겠냐”고 말했다.
그렇게 폭력적인 운동권과 평화로운 시민을 분할해 촛불을 끄려던 시도는 곤경에 처했다.
태초에 평화가 있었다. 촛불의 시민은 처음부터 “비폭력! 비폭력!”을 외쳤다.
거기엔 ‘우리는 주류 언론에 의해 폭력 낙인이 찍힌 운동집단과 다르다’는 의미도 담겼다.
송경아 소설가는 “촛불의 초기엔 일종의 순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며 “정치적이지 않은 시위가 정치로 규정돼 탄압당한 공포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순수한 시민은 ‘불순한 운동세력’과 자신을 구분하려 했지만 국가의 물리력은 순수한 시민을 비켜가지 않았다.
무장한 공권력이 비폭력 시민을 진압하면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 폭력·비폭력 논쟁이 일었다.
초기엔 절대적 준법을 강조했던 시민들은 거리에서 비폭력이 때로 준법을 넘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집시법이 불법으로 만든 도로 위에서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시민들이 생각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시민은 합법의 선을 넘었다. 아니 합법의 선을 옮겼다.
천준호 한국청년연합회(KYC) 공동대표는 지적했다.
“정부는 처음엔 촛불문화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시간이 지나며 촛불문화제가 아니라 거리행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나중엔 거리행진이 아니라 폭력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촛불은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정당성을 획득했다.”
![]() △ 7월1일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이 청와대로 평화행진을 하려다 경찰이 막자 몸싸움을 벌였다. |
그리고 또 하나 불법과 폭력의 문제다.
이재승 건국대 교수(법학)는 “흔히 ‘불법 폭력 시위’라고 해서 불법을 폭력과 동격으로 놓는데, 현행법상 불법이지만 폭력을 쓰지 않은 시위도 적잖다”고 지적했다.
모든 불법 시위가 폭력 시위는 아니란 것이다.
이 교수는 “현행 집시법처럼 집회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하면 불법 집회가 아니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임재성 활동가는 “비폭력 저항은 실정법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정의에 바탕한다”며 “국민 저항권을 명시한 헌법을 근거로 삼는 촛불 참가자의 비폭력은 집시법을 넘어선다”고 덧붙였다.
비폭력은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이용석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는 “비폭력은 법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경”이라며 “폭력은 하나의 방식을 강요하지만, 비폭력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폭력을 넘는다”고 말했다.
허를 찌르는 비폭력 행동이 폭력을 넘어선 사례는 촛불의 거리에도 있었다.
전경이 청와대 가는 길을 막으면 충돌하지 않고 피해가다 전경이 미처 막지 못한 길을 재빨리 찾아내 청와대로 접근했던 촛불의 발빠른 대응과 청와대행 8000번 버스를 탔던 청소년의 상상력은 그러했다.
불법과 폭력은 같은 말인가
임재성 활동가는 촛불들 사이에 비폭력 합의가 이뤄졌다고 분석한다.
“먼저 시민이든 전경이든 사람이 다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둘째는 조직된 폭력에 대한 거부다. 선봉대나 사수대처럼 시민과 분리된 명령체계로 움직이는 조직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촛불 참가자는 자위 폭력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세웠다.
맨몸의 시민은 저들이 때린다고 우리도 때리면 결국엔 더 맞는다는 간단한 사실을 몸으로 알았다.
그래서 시민은 짱돌 대신에 장미를 들었다.
임재성 활동가는 “시민은 무장한 국가 권력과 대비되는 ‘민간인성’을 내세웠다”며 “한편으로 비폭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맞고 끌려가는 모습을 누군가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연대감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렇게 비폭력은 무저항이 아니다.
YMCA ‘눕자 시민행동단’은 비폭력 평화행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6월29일 자정께 전경의 진압 앞에 누워서 저항한 눕자 시민행동단 70여 명은 전경의 군홧발에 무참히 밟혔지만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열배, 백배가 되었다.
한국청년연합회(KYC),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대한불교청년회 등 청년단체 활동가들이 7월5일 집회에서 비폭력 행동에 앞장설 ‘촛불의 승리를 위한 비폭력 평화행동단’ 조직에 나섰고, 며칠 만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가를 결의했다.
천준호 KYC 공동대표는 “비폭력적 방식으로 맞서고 평화적 방법으로 우리 의사를 밝힐 생각”이라며 “평화적 방법은 어렵고 희생이 따르지만 그만큼 무게가 실린다”고 말했다.
그들은 ‘때리면 맞겠지만, 촛불을 내릴 수는 없다’는 자세로 거리에 나선다.
이승호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은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면서 어둠을 밝히는 정의의 상징”이라며 “정의 없는 평화도 문제지만, 평화 없는 정의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촛불이 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폭력 상상은 인터넷 곳곳에서 넘친다.
진보신당 홈페이지에도 ‘명박산성 앞에 진보대교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올라왔다.
진보신당 1천 명 당원이 전경 앞에 누워서 ‘연와시위’를 벌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경이 때리면 맞고 잡아가면 잡혀간단 의미에서 ‘전 국민 마조히스트 프로젝트’로 불리기도 한다.
![]() △ 7월4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국법회.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
폭력에 이중잣대 들이대는 보수
한국의 보수는 폭력에 이중적 반응을 보인다.
일상의 폭력에는 관용적이면서 시위대 폭력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폭력에 대한 정치적 공정함이 부족한 것이다.
<닥쳐라, 세계화!> 지은이 엄기호씨는 “한국의 시위대는 절대로 과격하지 않다. 오히려 놀랄 만큼 질서정연하다. 세계 어디에 시위가 끝나고 쓰레기를 치우는 시위대가 있느냐”고 말했다.
한편 그는 “한국 시위대는 공권력에 완강히 저항하지만 사유재산은 절대 침해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며 “한국에서 모든 시위는 국민으로서 하는 시위이지 계급으로서 하는 시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으로서 하는 시위여서 국민윤리에 충실한 것일까.
민간인 자동차를 불태우는 프랑스 시위, 상점을 약탈하는 미국식 폭동을 생각하면 한국의 집회문화는 매우 성숙했다.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모여도 편의점 물건 하나 훔쳤다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여성이 다수로 참가한 촛불집회는 더더욱 평화적 원칙을 지켰다.
정권이 80년대식 진압으로 도돌이표해도 촛불의 역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촛불의 비폭력은 이미 평화의 역사다.
비폭력은 남을 해하는 힘을 쓰지 않지만 남을 감동시키는 힘이 세다.
그렇게 평화는 가장 끈질긴 저항이다.
끈질기게 노래하며 “기브 피스 어 찬스!”(Give Peace A Chance!) 존 레넌이 오노 요코와 함께 ‘평화를 위한 드러눕기 행동’(Bed-in For Peace)을 하면서 만들고 불렀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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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직접행동의 사례들
▣ 임재성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
최근 대안적인 저항 방식으로 떠오른 ‘비폭력 직접행동’은 사실 우리에게 무척 낯선 용어이다.
하지만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실천에서 기원을 찾으며, 서유럽의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에서 주로 사용돼왔던 비폭력 직접행동은 해외에서는 적극적인 저항 방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때론 느리기도 하며 늘 성공하는 ‘만능 해결사’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수단과 목적의 일치, 내부의 민주주의, 그리고 생명을 지킨다는 양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택해왔다.
1979년 5월, 3천 명의 사람들이 영국 스코틀랜드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토네스 핵발전소 부지를 점거했다.
핵발전소가 만드는 환경문제를 알리고, 핵발전 정책을 중단시키기 위한 실천이었다.
79년 5월5일 토요일, 사람들은 원자로 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반핵 전시회, 토론회, 집회를 개최했다.
점거는 일요일에 시작돼 월요일까지 계속됐는데,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물’에 대한 물리력 행사였다.
이들은 핵발전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로 했고, 그 외의 부분은 보존하기로 했다.
‘명박산성’을 두고 고민하는 촛불들처럼 이들에게도 핵발전소 부지 주변의 펜스를 어떻게 넘는가가 쟁점이었는데, 이들은 펜스를 절단하는 것이 자신들의 행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지역 농부들이 기부한 건초 더미로 계단을 만들어서 원자로 부지에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내부의 기물들에 상징적인 파괴 행위(타이어에 바람 빼기, 소모 물품을 사용하기 등)를 하면서 핵발전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며 사흘을 버텼다.
앞선 사례가 사물에 대한 폭력을 두고 쟁점이 형성된 사례라면, 다음 사례는 경찰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특징적인 사례이다.
1960년대 초반, 핵전쟁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모여 영국 런던과 공군기지 주변의 대규모 연좌시위 등을 조직했다.
이들은 ‘백인위원회’(Committee of 100)라는 반전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도심과 군사기지 주변에 ‘앉아 있는’ 방식의 점거를 택했는데, 그 과정에서 주변 경찰과 대화를 통해 경찰을 설득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그들은 경찰에게 욕을 하거나 사소한 물리적 충돌을 하는 것은 시위대에 불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실제 많은 경찰들은 진압에 투입되기보다는 병가를 내고 결근하는 것을 선택했다.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해서 다룬 책들은 이러한 사례들이 하나의 예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실제 저항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조건과 맥락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2차 대전 뒤 핵무기에 대한 적대감과 공무원인 경찰에 대한 신뢰가 앞의 사례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촛불을 둘러싼 우리 상황을 어떻게 분석해서 더 효과적인 비폭력 직접행동을 만들 수 있을까.
YMCA ‘눕자 시민행동단’은 6월 말 시민들이 폭도로 매도당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고도의 분석적이고 상징적인 저항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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