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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칼럼] 이명박 정부_한겨레 연재글

테마파크 2010. 3. 26. 23:32

 

[정혜신칼럼] ‘1억달러 내각’

 

이명박 정부 첫 장관 후보자 중 세 사람이 청문회를 앞두고 사퇴했다.

예견된 결과라는 대다수 의견의 한쪽에는 총선을 의식한 야당의 정략적 포석에 말려든 것이라는 일부 의견도 있다. 나는 총선과 연계짓는 일부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정치권과 언론에서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지칭하는 장관 후보자들에 관한 언급 뒤에 늘상 따라붙는 ‘일반 서민’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엔 그 표현조차 곱게 들리지 않는다. 그때의 일반 서민이란 자기 의견 하나 내세우지 못하는, 동정이 필요한 남루한 집단인 것처럼 느껴져서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 서민이란 자신의 권한을 순한 마음으로 행정부와 정치인에게 위임한 국민의 또다른 이름이다.
일반 서민들은 총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장관 후보자들과 청와대의 개념 없음 그 자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시하는 것이다.

3명이 사퇴했다고 근본적인 문제까지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후보들의 재산 합계가 1천억원 가깝다고 해서 나온 별칭이 ‘1억달러 내각’이고 국민의 2%만 내는 종합부동산세 납세자 비율을 현 장관 후보자들로 한정하면 80%에 이른다.

청와대 대변인의 말처럼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자격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지나친 게 맞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된다.

밤잠을 설치며 후보자들의 검증작업을 진행한 내부자 논리가 아니라 국민의 눈으로 보면 문제가 명료해 진다.
부동산 투기의혹에 시달리다 사퇴한 후보자들은 ‘일생 바르게 살아왔는데 부도덕한 부동산 투기꾼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소연한다. 교수 출신 후보자는 교수 부부가 25년 동안 30억원 모았으면 양반이라며 ‘다른 사람들을 보라’하고, 장관 후보들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연예인 출신 후보는 ‘내 재산 많다고들 하는데 배용준을 보라’고 공박한다.


그들의 처지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국민 처지에서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어렵다.
음식을 절반만 먹는 반식 요법으로 건강을 되찾은 어떤 이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 앞에서 반식의 효율성을 설파하는 격이다.
본인과 주위 사람들이야 놀랄 만한 효과를 봤으니 반식을 하자는 게 지극히 당연한 얘기겠지만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 말을 듣는 이의 처지에서는 생뚱맞고 황당할 수밖에 없다.

능력만 있으면 됐지 재산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식의 인식 또한 그런 맥락에서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1% 초상류층 내각이라는 표현에 타당한 구석이 있다면 장관 후보자들의 관심사는 더는 서민 수준의 욕구나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다.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 부모는 더 이상 복잡한 대학 입시제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욕구 충족이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콩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가족을 위해서 매일 콩이 들어간 잡곡밥을 해주는 엄마도 있다.
성숙한 인간이란 자기 욕구와는 별개로 타인의 욕구를 감지하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 능력이라면, 당연히 고위공직자인 장관의 능력에는 도덕성뿐 아니라 나와 타인의 욕구를 구별한 수 있는 힘이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현실감각의 기본이 되는 심리적 능력이다. 그게 있어야 능히 장관직을 감당할 수 있다.


일반 서민의 욕구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서민의 욕구를 대변하고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자임할 때 그런 능력이 정말로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고 이리 저리 따져 보는 일은, 백번 온당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뉴스 한겨레 | 기사등록 : 2008-02-27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72377.html

 

 


 

 

[정혜신칼럼] 권력에 대한 자의식

 

경찰청이 현판 교체 문제로 여론의 눈흘김을 받고 있다.

경찰청장이 바뀔 때마다 새 청장의 지휘방침을 적은 현판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 비용
으로 매회 4억8천만원 가량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세 명의 경찰청장이 현판 교체 비용으로만 15억원 가량을 사용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획기적으로 다른 내용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함께 하는 치안, 편안한 나라’라는 구호에서
‘최상의 치안서비스를 위해’로, 다시 ‘믿음직한 경찰, 안전한 나라’라는 구호를 전파하는 데 각각 5억원 가량을 사용한 것이다.

국가 예산이 단지 기관장 한 사람의 위엄을 위해 쓰여진 세금
낭비의 대표적 사례라는 날선 비판들이 줄을 잇는다.
그에 대해 경찰청은 ‘투입비용에 비해 효과가 충분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청장의 지휘명령이 치안일선까지 일사불란하게 전파돼야 하는 경찰조직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또한 구호들만큼이나 관습적인 항변으로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청장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청장의 첫 사업이 현판 교체’라는 식의 비판 기사가 적지 않았음에도 현판 교체 현상이 지금까지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특정 경찰청장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청이라는 일사불란한 조직이 총수의 지휘방침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총수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이미 확고하게 구축된 관습적 통로를 가진 경찰청 같은 조직에서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음달 새 청장이 취임하면 지금의 비난 여론과 상관없이 또다시 현판 교체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신임 청장이 그에 대한 문제 인식, 즉 자신이 소유하게 된 파워
와 그 파워가 일사불란한 경찰 조직이라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생기는 파괴력에 대한 자의식을 갖지 않는 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비단 경찰 총수에 국한된 문제일 수 없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자신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뼈저리게 의식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에 대한 심리분석과 상담을 많이 하는데 그런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권력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심리적 색깔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에 대한 사회적 검증이 일정 부분 끝났다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과 더불어 누구의 통제를 받는 자리에서도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색깔이 드러나는 과정 중에 생기는 일에 대한 자각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회사 앞 마당에 작은 연못
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피력했더니 얼마 후 수영장 크기의 호수가 하나 만들어졌단다. 어느 기업 사장의 볼멘 고백이다.
어떤 사단장이 퇴근하면서 연병장이 울퉁불퉁한 것 같다고 한마디
했더니 다음날 출근길에 연병장이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평평해져 있더란다. 밤새 수백 명의 사병들이 군화를 신고 땅을 다진 결과다.
한 재벌 기업은 총수의 분노나 스트레스가 거의 원형질 그대로 말단 직원
에게까지 전달되는 의사전달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효율적인 조직구조이기도 하지만, 독이 든 술을 마셨을 때 건강
한 혈관일수록 독을 온몸에 빨리 퍼뜨리는 것 같은 부작용도 있다.
리더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자의식이 아예 없거나 희박할 경우 그 폐해는 치명적이다.

일사불란한 조직의 수장일수록 자신의 권력이 갖는 영향력에 대한 자의식이 짱짱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15억이 아니라 15조의 재앙도 순식간이다. 특별한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심리적 조언이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칼럼] 자석언론의 ‘딸랑딸랑’ 저널리즘

 

‘허니문 제안’ ‘명비어천가’로 당선인 줄서기 / 권력 돌진하기보다 늠름·품격있는 언론되길

 

대선이 끝나고 지난 2주간 대한민국 언론은 대통령 당선인 관련 보도를 통해 ‘자석 언론’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언론 스스로 자석이 되어 최고권력에 들러붙기 위해 돌진하는 모습은 거대한 크기의 쇳조각과 강력한 자성을 가진 자석의 결합을 보는 듯하다. 우리 언론의 역사
에서 흔히 접했던 풍경이지만 아직도 이런 자석 언론의 속성이 원형질 그대로 남아 있는 현상을 목격하는 일은 착잡하다.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한다는 한 신문은 당선인에게 힘이 실릴 수 있도록 각 정파와 언론이 ‘허니문 기간’을 가지자고 제안한다.
친절하긴 하지만 언론이 먼저 제안할 일은 아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태들은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매체들에서 반복되고 있다.


한 방송국 노동조합은 대선이 치러진 19일과 20일 자사의 대선 관련 편성, 보도에 대해 부끄럽고 참담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선거 이튿날까지 80% 가량을 당선인을 위한 프로그램과 대선 소식으로 도배한 것은 물론 방송 내용도 당선인에 대한 낯뜨거운 칭송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개표율 6% 상황에서 방송 3사 중 가장 먼저 당선인을 확정지으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업무를 대신한 것은 물론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화려한 축하 이벤트를 개최했다.

선거 당일 방송이 지지자 행사인지 방송사 행사인지 분간되지 않았다는 노동조합의 질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기자협회 등이 분석한 대선 뒤 언론보도의 흐름을 한마디
로 요약하면 ‘당선인 줄서기’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이 당선인에 대해 감시와 견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위인전
식 기사나 찬사를 남발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언론계 동업자들에게 ‘딸랑딸랑 저널리즘’에서 탈피하자고 촉구하겠는가.
어떤 할아버지가 이담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전설의 고향 같은 당선인의 어린 시절 일화는 기본이고, 당선인의 이름 석 자를 이용한 용비어천가식 삼행시까지 등장한다. 전국 단위의 일간지나 지상파 방송이 스스럼없이 다룬 내용들이다.

나는 그 기사들을 보며 전두환 영웅담을 담은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떠올린다. 무엇이 다른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일시 자석은 외부 자기장
을 제거하면 자성이 없어지지만 영구 자석은 일단 자성을 가지면 외부 자기장을 제거해도 장기간 자성을 보유한다고 한다. 정치나 경제 등 ‘쎈’ 권력을 향한 언론의 속성은 영구 자석에 가까워 보인다.


대선이 끝난 며칠 후 이명박 당선인은 사석에서 정동영 후보를 ‘미친 개’로 비유하는 말을 했단다.
현장 취재 기자가 내부 보고를 올렸지만 모든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
결국 기사를 쓰지 못한 취재 기자가 다른 언론사에 기사를 제보하는 해프닝까지 거친 후에야 한 언론사에서 이 문제를 기사화했다.


나는 자석 언론의 속성을 접할 때마다 심리적 펀더멘털이 튼실하지 못해서 상황에 따라 급격하게 흔들리는 내담자를 만나는 느낌이 든다.
그런 이들은 상황 여하에 따라 그동안의 모든 것들을 백지화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은 늘 불안
하다.
변심은 확실한 데 변심의 시기만 상황 여하에 달린 연인과 사귀는 격이다.
그런 연인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질 수 없다면 더 딱하고 고단할 수밖에 없다.

자석 언론을 대하
는 국민의 처지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언제쯤이 되어야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늠름하고 품격있는 언론을 가지게 될 것인가. 다행히 시민단체나 언론 현업 단체들의 정밀한 분석에 의하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이번 대선과 관련해 언론으로서의 그런 기품을 잘 지켰다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8-01-02

 

 


 

 

[정혜신칼럼] 다양한 성공시대

 

자녀가 따로 사는 경우 부모가 돈이 많아야 자녀들이 자주 온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세계에서 유독 우리나라만 부모 소득과 자녀들의 방문 횟수가 밀접한 관계가 있단다.
소득이 1% 높아지면 자녀와의 대면접촉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조사 자료까지 더해지면 충격은 착잡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980년대에 상영된 <성공시대>라는 한국영화에는 매일 아침 만원권 지폐를 보고 인사를 올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얼마 전 한 성공학 강사는 공개강좌를 통해 벤츠를 타고 지나는 사람에겐 교통 경찰이 거수경례를 올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성공한 부자들이 그런 식으로 대접받아야 사람들이 성공에 대한 굳은 각오를 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을 불필요하게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는 역설화법일 수도 있지만 가슴에 쿵하고 돌 하나가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다 온 어떤 이는 한때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말을 보면서 그 천박한 부의 인식에 경악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성공에 대한 의미는 곧바로 부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목적한 바를 이룸’이라는 성공의 사전적 정의를 대입하여 현재를 돌아보면 대다수 국민이 목적하는 바는 자본의 축적으로 귀결되고 만다.
자녀를 한번 더 보자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세태 진단에 이르면 성공이 곧 돈이라는 등식은 절대적인 명제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목적하는 바가 반드시 자본의 축적과 연결될 수는 없다.

성공학 강사가 부자에 대한 존경심을 강요하듯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성공이 곧 돈이라는 인식을 강제하는 ‘거대한 힘’들이 너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라고 쓰인 이명박 후보의 선거 펼침막도 그런 거대한 힘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특정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문제 삼자는 게 아니라 이 후보 캠페인에 등장하는 성공이라는 개념이 곧바로 자본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오늘부터 여론조사 결과 공표 금지기간이므로 어제까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말하자면 이 후보는 대통령 후보로서 확고부동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 말은 국민성공 시대의 개막을 내건 이 후보의 공약들이 실제로 집행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 후보가 말하는 성공의 의미를 따져 물을 권리가 있다.
모든 국민이 돈을 많이 벌거나 일정한 사회적 지위 등을 갖지 못하는 순간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러한 국민성공 시대의 개념에 동의하기 어렵다. 때로는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항목을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그 실체를 더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성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해 묻고 싶다.


어느 시인의 한탄처럼 남들이 100년 걸린 일을 30년 걸린 나라가 정상일 수는 없다.
놀라운 외형적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은 압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 에머슨은 성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방적인 성공의 개념을 강요하는 모든 거대한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돈이 있어야 자녀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기막힌 현실에서 절절하게 떠오르는 단상들이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12-12

 

 


 

 

[정혜신칼럼] 이학수 보고서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이 삼성의 내부 고발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삼성의 순기능이 있지만 역기능은 임계점에 다다랐다. 삼성 스스로 자정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공론화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한 기자는 김 변호사의 내부고발은 결국 삼성그룹의 컨트롤 타워인 구조본(현 전략기획실)의 불법 행위와 이중 행보가 한계점에 온 사건이라고 진단한다. 흔히 삼성의 힘은 이건희 회장, 전략기획실, 계열사 사장단의 삼각편대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이학수 부회장은 삼각편대의 두 축을 장악한 인물이다. 삼성의 2인자로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실력자다. 이 부회장의 독립적인 막강 파워에 관한 내용을 기사화하다가 <시사저널> 사태가 촉발되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간단치 않다. 이제 ‘이학수’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직전 김 변호사에게 보낸 이 부회장의 문자메시지에는 은연중 그의 절대적 위상이 드러난다.
‘이학수 실장입니다’로 시작된 문자메시지는 ‘김 변호사가 마음만 먹으면 나와 만나서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마음만 먹으면 이 부회장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의 힘이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 사회, 이데올로기 분야로까지 넓어졌다는 평가를 고려하면 확실히 그렇다.


김 변호사가 제기한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해 국가기관들은 서로 책임을 미루며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고, 언론광고 시장에서 차지하는 삼성의 막대한 비중을 반영하듯 언론은 흉내만 내는 알리바이 보도를 일삼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삼성 쪽에서 의기양양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내부 고발자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공세를 취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안기부 엑스파일 등을 통해 이학수 부회장의 은밀한 육성을 이미 들은 바 있는 일반인으로서는 회사의 결백을 주장하는 현직 삼성 법무실장의 결기에 찬 사직의 변도 비장미를 콘셉트로 한 개그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시사인>의 최근 조사 결과, 이번 사건에서 삼성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는 의견은 18%에 불과하고 58.1%의 응답자는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끈 1등 공신이라는 이학수 부회장이 어째서 이런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비전략적 행태를 보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전문경영인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한다면 매출 140조원 규모의 모든 전략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삼성의 총사령관 이학수답지 않다.


나는 이학수 정도의 인물이라면 삼성의 역기능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세간의 걱정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여 이건희 회장과 함께 그에 대한 근본대책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3년 혁명적으로 시작된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삼성 내부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한 후쿠다 보고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삼성은 모든 것을 바꾸었고 오늘의 글로벌기업 삼성이 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재의 삼성은 더는 ‘후쿠다 보고서’가 존재할 수 없는 조직처럼 느껴진다.


삼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임계점을 넘은 삼성 내부의 문제를 통렬하게 인식할 수 있는 내부인이 필요하다. 역설적이지만 지금 삼성 내부에서 그런 힘과 지략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0년 후에도 굴러갈 삼성시스템을 만드는 게 꿈이라는 이학수 부회장의 소원이 이뤄지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삼성에는 ‘이학수 보고서’가 필요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11-14

 

 


 

 

[정혜신칼럼] 원칙 없는 원칙

 

지난 5월15일 소말리아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인 선원 네 사람이 무장 해적들에게 납치됐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7월19일 이번엔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교회신도 23명이 탈레반 무장 세력한테 납치됐다. 아프간 인질 사태가 43일 만에 해결된 반면 소말리아 피랍 선원들은 아직도 풀려나지 못한 채 한국인 피랍 최장 기록을 세우며 납치 162일째를 맞이하고 있다. 인질의 수만 다를 뿐 대한민국 국민이 무장 세력들에게 납치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런데 두 사건을 대하
는 정부의 대처는 전혀 다르다는 게 중론이다.
국민들은 그러한 정부의 태도가 사건의 해결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다.
국회 외교통상위 위원장은 아프간 피랍 사건과 비교해 경제적 약자인 외항선원 납치 사건에 너무 소홀하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대다수 국민의 생각도 그와 비슷하다. 하지만 원칙과 절차를 강조하는 정부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해적과는 협상
할 수 없다는 정부의 원칙, ‘각’ 나온다. 향후 선례를 남길 수 있어 석방금을 지원할 수 없다는 정부의 태도, 그럴듯해 보인다.
관련 보도가 나갈수록 선원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며 가족들의 입을 막아온 정부의 일처리 방식, 깔끔하다.
하지만 정부의 그런 원칙적 태도로 말미암아 피랍 선원들은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해적들은 마약풀을 먹은 환각 상태에서 선원들에게 끔찍한 구타와 고문을 가하며 돈을 주지 않으면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 이빨
이 부러지고 고막이 터졌다. 개돼지도 먹지 못할 모래쌀로 연명을 하며 선실에 갇힌 채 배에 기름이 없어 밤에는 암흑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162일째다. 오죽하면 자신들이 갇혀 있는 배를 포격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해적과 협상할 수 없다는 정부의 원칙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원칙인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서는 정부가 고수해야 할 그 어떤 원칙보다 우선해 국민의 생명 그 자체가 최고의 원칙이어야 합당하다.

통상 해적과의 협상에서 정부가 선주 대신 몸값을 지급한 사례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는 피랍 선원들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외교부의 예산이 부족해서 협상금
을 낼 수 없다는 발언에까지 이르면 국민 처지에선 적개심마저 생겨난다.


혹여 ‘국가’라는 단어가 ‘국민의 가정’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면 소말리아 피랍 사태와 관련해서 우리에겐 국가가 없는 게 확실하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는 혹시 아이가 집으로 돌아올까봐 수십년 이사
도 가지 않고 심지어 밤에 대문을 잠그지도 못한다.
자기 가족이 인질로 잡혀 고통 속에서 희미한 생명선을 이어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반 년 가까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방치하는 가정이란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같은 코미디영화
가 아니라면, 단언컨대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가장 기초적 의무인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등을 돌리는 국가란 이미 국가가 아니다.


힘은 없으나 부끄럽지 않은 시민들이 힘을 모아 ‘소말리아 피랍 선원들을 위한 시민모임’(소선모)을 결성했다.
‘소선모’는 피랍 선원 석방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여 순식간에 5억원을 모았다. 가슴
이 답답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들이다.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간절히 바라는 ‘소선모’의 취지문 한 구절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

정부마저 피랍자들에게 등을 돌린 지금, 피랍 선원과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국민뿐’이다.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쓸쓸하고 분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10-22

 

 


 

 

[정혜신칼럼] 판사들의 나라

 

한 달 전 ‘정혜신 칼럼’에서 나는 법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썼다.
인혁당 관련 배상 판결에서 스스로 법원 판결의 불법성을 최초로 인정한, 자기교정 능력이 남다른 판사들을 향해서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법관들에게 분노한다.
정몽구, 김승연 회장에 대한 잇따른 집행유예 판결을 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이 법치 국가가 아니라 그 법을 집행하는 ‘판사들의 나라’가 아닌가 하는 속된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법의 정의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고려한 판사의 가치관과 식견, 취향과 아량에 온전히 기대는 나라인 듯해서다.
집행유예 선고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연, 기고 등 이상한 사회봉사 명령을 새로운 법해석처럼 덧붙이거나 마치 재벌 회장에게만 아버지의 정이 있는 것처럼 부정을 강조하는 법원의 판결은 비상식적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의 처지에서 아무리 분노하거나 호소해도, 법관은 법의 정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 한점 부끄럼 없이 판결한다는 내적 소신만 있으면 그 어떤 상식이나 여론도 단번에 무력화할 수 있다. 법관의 소신에는 어떤 대항도 불가능하다. 그런 절대적 권위 때문에 혹시 판사들은 법리적 분야에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스스로를 최고의 판단 전문가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의 솜씨로 매번 고난도의 심장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심장전문의도 심장병 환자의 부부갈등 문제까지 적절하게 봉합할 수 있는 전문가이기는 어렵다.


법원이 두 재벌 회장에게 실형 선고를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에 처할 위험이 있다’는 현실적 고려다.
영화 <공공의 적2>의 그 유명한 대사, ‘이 나라가 걱정이구만’ 모드를 벗어나지 않는 중증 나라경제 염려증이다.


정몽구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재판장은 이번 판결을 위해 일일이 택시기사, 식당 아주머니 등 100명이 넘는 서민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정 회장 같은 경제인은 국익을 위해 풀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훨씬 많았단다. 하지만 판결 직후 한 시사잡지가 서민층 100명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한 결과는 전혀 다르다. 이번 집행유예를 적절한 판결이라고 답한 사람은 30명뿐인데, 그렇게 대답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재벌회장에겐 실형을 선고해도 어차피 금방 나오게 될 것이므로 그럴 바에는 돈이라도 내놓도록 하는 게 낫다는 식의 사법 정의에 대한 불신 때문에 집행유예를 지지했다. 이처럼 여론조사 하나에서도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그 방법과 해석에서 전혀 다른 차이를 보인다.
한 경제학자의 지적처럼 사법부는 경제적 영향이라는 잘 모르는 영역을 살필 게 아니라 법리적 고리로 판결을 내려야 한다.


김승연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며칠 후 보복폭행 사건 수사관들에게 뇌물 전달을 부탁한 한화그룹의 한 임원은 회사의 재력을 이용해 사건을 은폐·축소하려 했다는 이유로 실형 선고를 받고 법정구속되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법치국가의 근간이 단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재벌의 나라, 정치인의 나라, 교수나 성직자의 나라가 아닌 것처럼 판사의 나라 또한 아니다.
우리들은 모두 민주공화국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자기 역할을 분담하고 있을 따름이다.


법관들 처지에서는 법원의 신성한 판결에 딴죽을 거는 듯한 국민들의 발언이 가소롭거나 무지몽매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판단 행위가 판사들만의 독점 영역이라고 간주하는 오만이 없다면 이번 판결이 ‘상식있는 국민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여론에 대해서 신중하게 귀울이고 판단의 전문가답게, 공정하게 판단해 달라.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09-26


 


 

 

[정혜신칼럼] 말해줘서 고맙다

 

부모가 다투는 소리에 잠을 깬 아이가 “엄마 아빠 싸워?” 라고 묻자 “네가 무서운 꿈을 꾼거야. 어서 자라”는 식의 대처를 반복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점차 자기 감각이 보내오는 신호를 믿을 수 없게 되어 현실감각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가 지속적으로 정보를 왜곡할 때 나타나는 폐해다.


불행하게도, 현실세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
하는 대한민국의 법체계는 그동안 앞의 부모처럼 정보를 왜곡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니 알고 내 알고 하늘도 아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한 채 그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면서도 법의 준엄함이나 권위를 앞세워 국민들을 훈계했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 점에서 지난주 법원의 인혁당 관련 배상 판결의 내용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올해 초 재심을 통해 형사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진 바 있지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규정한 이번 판결은 더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기교정
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자를 포함해 637억원에 이른다는 사상 초유의 배상액 때문이 아니다.
법원 스스로 자기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권의 최후의 보루
라고 믿었던 대법원마저 …” 라는 판결문의 일부는 사건 당시 대법원이 인권의 보루라는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명확하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자기고백적이다.
“국가가 배상책임
을 피하기 위해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구차하다”고 질타하는 대목은 통렬하다.

담배 회사가 스스로 담배의 끔찍한 해악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법원이 해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히 사건 내용을 뒤집는 수준이 아니라, 특정 판결의 위법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동료 법관이나 법조계 선배가 민형사상의 책임을 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다면 그 결정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더구나 그로 말미암아 법원의 최종 판결도 잘못될 수 있다는 법질서 붕괴 상황까지 연상된다면, 어느 법관인들 한발 빼고 싶지 않겠는가.


그동안 우리의 법정신은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기보다 국가나 법 자체의 권위를 지키는 데 주력해 온 측면이 많다.
‘전쟁은 국가의 몫이지만 죽음은 개인의 몫’이라는 식의 불친절로 일관했다.

이번 판결을 통해 비로소 국가나 법의 권위에 앞서 한 개인의 존엄성과 권익을 지키는 진정한 법 정신이 구현된 셈이다.


미국에는 의사, 환자 사이 의료분쟁과 관련된 ‘아임 소리 법’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치료
이전에 예상치 못한 합병증이나 의료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의사가 환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도록 한 ‘사과법’이다.
다만, 의사의 사과가 자기 실수를 인정한 법적 증거로는 이용되지 못하도록 면책조항
을 단서로 달고 있다.
일부 부작용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사과가 환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의료 소송
을 줄이고 있단다.


남편이 사형을 당하자 빨갱이로 몰릴까봐 아무도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고 그래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아 ‘지금은 말을 똑 부러지게 못하는 사람이 됐다’는 어느 유족의 고백은 가슴이 시리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한 가족들의 사연 하나 하나는 통곡과 회한의 바다를 이룬다. 

직업
 특성상 법관들에게 ‘사과법’을 적용할 순 없겠지만, 잘못된 판결을 인정하여 이런 억울한 가슴의 대못을 뽑아주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법관들의 자기교정 능력에 박수를 보내지 그를 빌미로 법의 권위를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판결의 재판장을 맡았던 권택수 판사로 상징되는, 자기교정 능력이 남다른 법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08-29

 

 


 

 

[정혜신칼럼] 그게 다가 아니다

 

나는 직업상 제3자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외형적 조건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안정된 경제력에 그럴듯한 직업에 공부 잘하는 자녀까지 둔 사람의 무기력과 우울은 이해할 수 없는 사치한 투정쯤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심리적 착시 현상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재물이 넉넉하면 어지간한 다른 결핍들은 능히 견딜 수 있다는 환상에 가까운 믿음들이다.
성공
이란 자기억압의 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이들이 따로 치러야 할 심리적 비용이 적지 않을 수 있다는 정신의학적 설명을 곁들여도 많은 이들은 ‘그래도 그런 고통 한번 겪어보았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 성과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을 비합리적이고 소모적인 의사결정
인 것처럼 취급하는 사회적 인식이 횡행한다.


범여권 지지율 1위 대선 예비후보라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지난 3일 ‘광주
발언’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민주화 세력 정통성 논란과 관련된 여타의 발언과 공방
은 논외로 하자. ‘올해 대선에서 광주정신을 실현하는 길은 한마디로 일자리’라는 손 전지사의 발언은, 한마디로 착잡하다.

아무리 일자리 창출
이 손 전 지사가 중시하고 자신있는 정책과제라 해도 이 정도면 ‘천박한 광주인식’이라는 일부의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인간이 지닌 본래의 심성을 지키고자 했던 광주정신마저 궁극의 목표가 일자리 창출이라는 경제적 성과로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 너무 남루하지 않은가.

광주항쟁 당시 죽음을 예감하고도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이들의 행동은 얼핏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일생을 죽음보다 더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때의 합리적 의사결정이란 뜻을 함께했던 이들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은 겉으로 드러난 경제논리나 합리적 이유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와 관련된 한 연구에서, 수감자들은 목숨을 겨우 유지할 정도로 최소량의 식수만을 지급받았는데 어떤 이는 그걸 반만 먹고 반은 남겨서 자기 몸을 씻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은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식수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물로 몸을 씻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식수를 남겨서 자기 몸을 씻은 사람들의 생존율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높았다는 게 연구의 결과다.
우리 중 누군가는 생존에 필수적이라 여겨져온 양의 수분
을 공급받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자기 품위를 유지할 때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손 전 지사는 경기지사 시절 전국에서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의 70%에 해당하는 74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경기도에서 연평균 7.5%의 경제 성장률을 이룩했단다. 그런 성과들이 있어서 오늘의 대선 예비후보 손학규가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다일 수는 없다. 여러 중요한 사안 중 하나에 불과하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손학규 정도의 인품과 학식을 갖춘 이가 어째서 광주정신까지도 일자리로 환치시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적 성과를 보여줄 수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사안을 경제논리 하나로만 밀어붙이며 미래의 경제 대통령을 자처하는 이는, 정말이지 한 사람이면 족하다. 우리는 사람이지 경제 동물
이 아니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08-06


 


 

 

[정혜신 칼럼] 검증의 최종 목적

 

나는 박사가 아니다. 박사가 아니라서 아쉽거나 주눅든 적은 없다.
임상의로서 필수적인 최종자격증은 전문의 자격증이라고 생각해서다.

학위를 취득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만큼을 나는 내 자신이 정신분석을 받는 일에 투자했다.
그게 정신과 전문의로서 더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문적 필요에 의해서든 환자의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든 박사 학위를 가진 의사들이 유난히 많은 까닭에 사람들은 으레 나를 박사로 부른다. 처음엔 호칭 문제에 대해 일일이 설명했지만 정황상 매번 정색을 하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기업체 등에서 강의를 할 때 미리 경력 등을 자세히 적어 보내도 많은 경우 기업의 담당자가 청중에게 나를 소개하는 호칭은 박사다.
그래야 강의의 후광이 생긴다고 믿는, 무릎반사
같은 자동 행동이다.

동국대 가짜 학위 사건은 간판 효과의 결정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학위라는 것이 업적이나 전문영역의 활동과 아무 인과관계가 없다고 의심할 만한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서 오히려 증명서에 많은 것을 의존했던 간판 시스템의 부작용이 부각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학위와 관련된 어설픈 검증을 탓하며 앞으로 더 철저한 검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목소리
를 높이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대담한 거짓말을 일삼아온 당사자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와는 별개로,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검증 시스템이 갖춰지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예술계는 특정인의 예술적 내공을 정확하게 감정할 능력이 부족해서 그들의 학력이나 이력을 통한 기능적 검증에 의지하다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평단과 대중이 모두 인정하는 중견 소설가와 또 다른 중견 시인은 학위를 따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강단에 서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필수 코스라서 그럴 것이다.
이미 문학적 검증을 충분히 끝낸 그들에게 어째서 그와 관련한 간판을 따로 요구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능적 검증 제도에서 비롯하는 폐해다.


때로 과학과 학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검증의 과정이,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나 예술성을 따져 보는 일에도 ‘그 모습 그대로’ 적용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검증의 최종목적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 듯한 검증 시스템을 접하게 되는 경우 더 그렇다. 전투기나 원전기술
의 도입, 소믈리에나 위폐감별사처럼 기능적 검증이 필요한 영역이 아닌 경우 물리적으로 인간을 줄세우는 검증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


수능시험 자체의 변별력을 검증하는 일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수능점
수로 사람을 줄세우는 파괴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대학에서 원하는 학생을 선발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검증의 잣대에 대한 다양하고 치열한 고민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난 1년간 경험했던 자연의 현상 중 가장 강렬했던 소리의 기억은 무엇인가’
‘지난 3년간 가족 이외의 어린 아이를 안아준 경험은 얼마나 되는가’
‘지난 1년간 나 이외 타인의 고통으로 심장
의 통증을 느낀 적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은 소박하지만 과학적 합리성을 갖춘 검증 시스템을 도입해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찬찬히 음미하고 분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그 대상이 수험생이든 대학교수든, 대선 후보든 검증의 최종 목적에 좀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로 효율적인 검증 시스템이 필요한 경우는 검증의 본래 목적에 적합한 ‘기준’을 검증하는 일을 할 때다.

 

어떤 이를 검증하고자 할 때 검증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따지다 보면 그에 꼭 맞는 검증 시스템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혜신 | 정신과 전문의
| 기사등록 : 2007-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