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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가는 까닭

테마파크 2010. 2. 15. 18:52

 

<사람들이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가는 까닭>

 

보수에서 진보로 생각이 바뀐 사람은 드물어도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간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80년대 극렬 주사파들이 언죽번죽 ‘뉴라이트’란 이름으로 나오듯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는 한국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바라던 사람들이 어느새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권력의 성 안에서 풍악을 울립니다.

 

보수에서 진보로 넘어가는 데엔 여러 까닭이 있죠.

 

먼저 현실의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지배체제에 대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돈이 별로 안 되는 일이란 거예요.


젊었을 때는 지갑이 홀쭉해도 뜻을 간직하며 진보를 외칠 수 있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경제형편을 모른 척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만 고생하면 상관없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생명체라면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고 진보라고 다를 리가 없죠. 보다 더 고르게 잘 사는 사회를 위해 땀을 흘리지만 현실은 쉽사리 달라지지 않고, 앞날은 흐릿하기만 하니 슬슬 처음에 지녔던 마음이 뒤숭숭하게 됩니다. 다들 ‘적당히’ 눙치면서 배 두드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뭐 잘났다고 이렇게 가족들 고생시키고 있나, 이런 생각에 미치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 1988년 10월 종로성당에서 열린 ‘양심수 전원석방 및 석방인사 환영대회’에서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던 재야운동가 김문수 @연합뉴스 

 

얼마든지 가난하더라도 진보 쪽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보수로 넘어간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으로 보수화되는 흐름을 짚어볼 수 있지만 충분치 않아요.

힘들더라도 그것을 헤쳐 나아가는 콩콤(재미)도 꽤나 짜릿하거든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얼마든지 가난하더라도 진보 쪽에 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커다란 벽이 나타나죠.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려고 할 때, 아주 조용하게 마음을 무너뜨리는 집단이 있죠. 바로, 대중입니다.

 

지난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빈은 엄청난 기운이 샘솟는 곳이었죠.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라이히, 클림트 등등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오갔으며, 논리실증주의를 들고 나온 ‘빈학파’가 생겨나고 신자유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학파’도 이때 피어올랐죠. 그런 재주꾼들 가운데 사회학자 빌리 쉴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쉴람은 독일공산당 기관지에 글을 쓰고, 좌파로서 나치 정권 시대에 히틀러를 비판하면서 이름을 떨친 오스트리아 언론인이었죠.

스탈린을 비판한 뒤 우파가 되고, 미국 우파의 대변지 『내셔럴리뷰』를 만드는데 힘쓰며 미국 보수주의의 현대화에 이바지한 인물로 꼽히죠. 이 사람이 우파로 넘어가기 얼마 전, 국민투표하는 대중들을 보면서 이런 글을 씁니다.


"사회의 대중들이 자기 삶에 대한 통찰과 이성을 통해 사회를 개선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던 시대는 사실상 지나가 버렸다.
또한 대중들이 사회를 만드는 기능을 지녔던 시대도 사실상 지나갔다. 대중들은 철저히 일정한 틀로 주조되고, 의식을 잃은 채 어떤 종류의 파렴치한 행위에도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게는 역사적 사명이 없다. 탱크와 라디오의 시기인 20세기에 그들에게는 어떠한 사명도 남아 있지 않다. 대중들은 사회의 형성과정에서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쉴람을 보면서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갈 때 합리화시키는 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대중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우파로 생각을 바꾼다는 거예요.

 

좌파는 어렵더라도 대중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꿈꾸죠.

노무현식으로 말하면, 버스가 꽉 찼는데도 바깥에서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니 힘들지만 태우자는 게 진보죠.

 

보수는 진보와 달라요.


지금 있는 사람들도 버거운데 누구를 또 태우냐고, 어려운 사람 챙기는 건 ‘포퓰리즘’이라며 그냥 지나가는 쪽을 고르죠.

조금 모질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 퍼주려는 건 불가능하며 있는 사람이라도 잘 먹자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줘봤자 ‘평민’들은 금방 까먹는다며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굴죠. 이러한 생각이 현실에선 복지예산을 줄이는 MB정부 정책에 깔려있습니다.

 

정치인 이재오씨가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시절이던 1989년, 임진각 자유의 다리로 향하는 철망문에서 미군 병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 @한겨레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은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과제

 

진보는 보수처럼 차갑게 자르지 못해 흔들립니다. 대중들을 믿고 싶지만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은 현재 한국 사람들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과제이고, 이대로 가면 영영 이룩하기 힘든 목표이기에 불안은 더 커지죠.

 

대중들에게 힘이 있고 대중들이 깨어나야 한다고 소리쳐 봤자 대중들은 심드렁한 채 투표를 안 하거나 하더라도 자기 계층과는 동 떨어진 정당을 찍을 때,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이렇게 10년, 20년이 지나면 한결 같던 마음도 두 결, 세 결로 나뉩니다.

듣지 않는 대중을 위하면서 굶기보단 자기 한 몸이라도 챙기는 게 낫다는 생각이 퍼지는 거죠.

따뜻하고 진지하게, 가끔은 쉽고 재미있게 얘기를 해봤자 달라지기는커녕, 꼼짝도 안 하는 대중들에게 지친 거죠.

 

그러다 보수로 넘어갑니다. 왜? 지식인은 우파로 변신만 하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까요.

지배권력 핥아주는 지식을 내놓으면 두둑한 보상을 받습니다.

 

눈을 돌려보면, 80년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얼마나 ‘민중’에 대한 사랑을 목 놓아 외쳤는지요.

그러한 사랑을 오늘날까지 품고 있는 사람보다 미움으로 탈바꿈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어차피 인류 갈마(역사)는 힘 센 사람들이 어깨에 힘 줘왔고, 대중들은 고개 숙이고 무릎 꿇는데 익숙하다며 자신의 전향(변절)을 정당화하며 넌더리내죠. 꼭대기에 있던 사람은, 그러면 그렇지, 라며 당당히 얼굴색을 바꾼 이에게 손을 뻗어 자기네 자리로 끌어올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손가락질만 하기엔 걸리는 게 많습니다. 때론 그들이 더 슬기로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대중들을 믿으며 그들을 위한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고달픈 일인데 그걸 계속 하라고 어느 누구도 떠밀 수 없습니다. 정작 사람들은 알아주기는 커녕 오히려 돌을 던지는데, 씁쓸함을 무릅쓰고 끝없이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보내기란 웬만한 사람 아니고선 어렵죠.

 

그렇다고 전향한 사람들을 그만 두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에 눈을 더 뜨자는 거죠.


진보의 얘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지만 보수의 손짓은 아주 달콤하게 대중들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모두를 위한다는 막막한 목소리보다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더라도 자신을 위해 먹거리를 가져다주는 걸 대중들은 더 좋아합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주겠지, 라며 MB만 비판을 해봤자 대중들은 당신이나 잘 하라고 하는 현실을 봐야 합니다.

 

대중들이 변해야 정치사회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대중들은 내비둬~ 를 외칩니다.

차가운 웃음이 ‘신의 손’처럼 생겨나 지식인들이 하는 말을 다 막아내고 있어요.

TV와 휴대폰의 시기인 21세기에 대중에게는 어떠한 사명도 남아있지 않다며 진보인사들이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20대도 보수화, 대중도 보수화, 지식인도 보수화, 이런 판국에서 사는 건 갈수록 빡빡해지고 투표율은 날로 떨어집니다.

오로지 TV 속 연예인만 활짝 웃고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얘기로 희망을 갖기엔 대중들이 너무 싸늘합니다.

 

 

오마이뉴스 블러그 | 꺄르르 | 2010.02.15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