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무능불통)뇌물정권/박근혜복지정책

[복지국가를 말한다](1) 가족에게 미뤄온 국가복지

테마파크 2011. 5. 9. 17:40

 

[복지국가를 말한다] 복지는 국가의 의무다

 

ㆍ개발 중심 승자독식 사회… 가족에 떠넘긴 ‘안전망’
ㆍ국가시혜 아닌 국민권리, 전사회 패러다임 바꿔야

 

자살은 한국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34분에 1명, 1년이면 모두 1만5413명(2009년 기준)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계 15위 규모의 경제대국의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자살 소식에는 계층간 구분도 없다.

명문대생도, 해고된 노동자도, 가난에 시달리는 노인들도 삶을 포기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2배를 넘는 자살률.

불안은 만연하고 서점가에는 ‘정의’와 더불어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묻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사회가 잘못 굴러가고 국민이 극한에 내몰리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광복 이후 우리 국가의 역할은 ‘개발주의’가 중심이었다.

국가는 대기업 위주로 경제성장을 꾀했고, 노동자들은 이에 협력하면서 적은 몫이나마 이익을 나눴다. 하지만 이 같은 ‘게임의 룰’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한을 다했다. 전체 상장사의 고작 2% 기업이 총이익의 67%를 차지하고 10대 그룹 계열사들이 사상 최대의 이익잉여금을 곳간에 쌓아두는 시대가 됐지만, OECD 국가 중 최고비율인 비정규직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영세자영업자는 매일 폐업을 걱정하고 청년백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간다. 파이가 커져도, 승자독식의 구조에서 나눔은 사실상 없다.

 

빈곤계층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가족들은 피로를 호소한다.

국가가 제공했어야 할 보육, 노인, 주거, 교육복지의 부담을 가족이 짊어지는 구조로 지난 수십년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복지예산이 OECD 국가 중 꼴찌인 것은 최소한의 복지 책임마저 국가가 가족에게 떠안긴 탓이다. 국민들은 주택담보대출, 카드론 등 각종 개인채무로 생존하는 ‘빚 권하는 사회’에 산다. 부담에 짓눌린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복지를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가 베푸는 것으로 종종 오도한다. 서울대 장경섭 교수(사회학)는 “국가가 경제개발을 위해 재벌과 유착하면서 기업가적인 사고 프레임을 갖다보니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정서가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최근 복지에 대해 높아지는 시민의 관심은 국가의 ‘복지 무임승차’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고 있다.

각종 복지 관련 단체가 결성되고, 정치권에서는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복지 논쟁이 진행 중이다.

개발주의가 폐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복지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편적인 복지정책 그 이상이다.

노대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복지사회의 기본은 공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건강한 경제와 노동시장이며, 국가의 재분배만으로 복지를 이루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조세정책에서 노동정책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 자체를 복지시대에 맞게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복지기획은 이런 취지에서 출발한다.

복지의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노동, 기업, 국가의 사회적 합의점을 모색해보고자 함이다.

그간의 복지논쟁이 주로 정치권과 학계 중심으로 이뤄져왔다면 이번 기획은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복지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복지는 어느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점에서 가족과 이웃들을 통해 복지국가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다.

 

 

■ 특별취재팀 최민영·송윤경·유정인·김지환·박은하 기자
■ 블로그 welfarekorea.khan.kr
■ 이메일 min@khan.kr

 

경향닷컴 | 2011-05-08 21:51:23 | 기사보기

 

 


 

 

[복지국가를 말한다](1) 가족에게 미뤄온 국가복지

 

1965년생 강제균씨 예로 본 복지

- 중산층 가장, 일상적 빈곤 위기 “회사도 국가도 못 믿어”
- 회사만 믿던 아버지, 병들어 실직 후 가족 삶 곤두박질

 

 

 

경기 군포시 당정동의 한 아파트 단지.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상가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강제균씨(46)는 홀로 13평짜리 쌀집을 지키고 있었다. 복지에 대해 묻자 그는 김황식 국무총리 얘기부터 꺼냈다.

김 총리가 "(복지) 혜택을 받는 분들은 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해 물의를 빚은 그 발언이다.

 

 

"그 말은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없는 사람은 국가에 고마워하라? 총리의 그런 마인드, 잘못된 것 아닌가요." 그의 성토가 이어졌다.

"가령 리비아에 체류하는 국민이라면 리비아 내전이 터졌을 때 대한민국이 나를 구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잖아요. 복지도 마찬가지죠. 내가 열심히 일하면 국가가 미래의 삶을 보장해줄 것이다. 이런 기대감이 있는 거죠. 근데 왜 그걸 지나친 욕심인 것처럼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학교 무상급식'이 쟁점으로 떠오른 이후 복지의 확대 필요성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세로 굳어졌다. 그러나 정치권은 '보편이냐 선별이냐' '증세냐 아니냐' '경제가 먼저냐 복지가 먼저냐' 등의 이분법적 논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2011년 한국사회가 맞이한 복지논쟁의 핵심은 이제껏 국가의 복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던 이들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겉으로는 경제적으로 건강해 보이는 중산층에서도 넓게 퍼지고 있다.

중산층 가정의 가장인 강씨가 정부의 '시혜적 복지관'에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왜 일까.

이 의문의 뿌리를 찾아 읽는 데서부터 복지논쟁은 다시 출발해야 한다. 강씨가 살아온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가장이 '번듯한 직장' 잃자 생계 책임은 온 가족 몫 -> 어머니·형제 생활전선에

"국민이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합쳐서 오로지 수출과 증산과 건설에 매진한다면…."

1965년 1월16일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새해 시정방침을 밝히는 연두교서를 읽고 있었다.

관공서에는 '1965年度는 일하는 해'라는 포스터가 요란스레 나붙어 있었다. 바야흐로 수출주도형 경제가 태동하던 그해, 강씨는 태어났다.

강씨의 아버지는 운수회사에서 고속버스를 몰았다.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이었다.

항공 조종사처럼 제복 입고 때때로 박하사탕을 들고 멋있게 퇴근하던 아버지는 늘 "회사가 잘 돼야 우리 식구가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는 회사를 믿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가족은 '번듯한 일자리'를 가진 가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졌다.

강씨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한 가족들은 어린 자식들을 일터에 보내야 했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영세민의 자녀들이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면서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하고 있다"고 알려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국가가 경제발전의 가속페달을 밟는 동안 삶과 생존에 대한 부담은 가족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보통의 가정은 어느 집이나 과부하에 시달렸다. 강씨 가족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쉬는 날이라곤 한 달에 겨우 이틀, 나머지는 그야말로 밤낮없이 일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였다. 가장이 2~3년 병마와 싸우는 동안 강씨 집은 자가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떨어졌다. 아이 셋을 키우는 어머니는 곰인형을 기우며 버텼다.

아버지가 다시 일어나 재취업을 했지만 집안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살림이 펴진 것은 1980년대 초 자녀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부터였다. 그 뒤에도 어머니는 의류공장, 음료공장, 인쇄공장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1970, 80년대 경제성장의 신화를 떠받친 것은 이처럼 어떻게든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쓴 가족이었다.

 

 

■ 군사정권도 말로는 '복지'… 고용보험 등 '그림의 떡' -> 불안한 개인 생명보험 붐

군사·독재정권은 국민들에게 '다 함께 잘 사는' 복지국가의 미래를 약속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여 국민생활 향상과 복지사회 건설을 기할 것"(1962년 연설)이라고 선언하고 10월 유신 뒤에는 "10월 유신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면 보다 많이 땀을 흘려 복지국가를 만들어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자는 것"(1973년 기자회견)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에 정권을 잡은 신군부 역시 "새 시대 목표"라면서 "민주복지국가"를 국정지표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사회안전망은 텅 비어 있었다. 의료보험법은 1963년에 만들어졌지만 14년 뒤부터 시행돼 1979년 보험 적용대상은 공무원, 교원, 대기업 직원을 중심으로 전체 국민의 21.2%에 불과했다. 공적 연금제도는 1988년 이전까지 공무원, 군인, 사립학교 교직원에게만 적용됐다. 실업급여가 나오는 고용보험도 1995년에야 도입됐다.

비어 있는 안전망은 가족이 채워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 급팽창한 한국의 생명보험·손해보험 시장이 이를 보여준다.

한국의 민간보험사가 거둬들인 보험료 규모는 1990년 세계 1위(GDP 대비 보험료 수입)를 기록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척박한 국가 복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넥타이 매고 일할' 자식의 미래를 그리며 "가족을 먹여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세대들이었다.

강씨의 아버지도 그랬다. 그는 경제개발을 주도하는 정부에 항상 고마워했다. 어디에 있든 아버지는 오후 6시 국기하강식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퍼질 때면 국기게양대를 찾아 경례를 했다. 아버지는 예순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직업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긴 분이었지만 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 그 피로감이 깊이 쌓였던 것 같다"고 강씨는 말했다.

 

 

■ IMF 뒤 회사선 "고통분담" 복지는커녕 해고 공포 뿐 -> 퇴직후 자영업 빚더미에

세월이 흘러 강씨도 아버지가 됐다.

첫아이를 신생아실에서 만나 가슴이 뭉클했던 때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1997년이었다.

강씨는 외환위기의 충격파를 남들보다 먼저 맞았다. 그의 첫 직장이던 건설회사가 IMF 구제금융 직전에 부도가 나면서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부도가 다가올 무렵 당시 건설회사의 회장은 '여러분은 다른 데 가서 생활하면 되지만 난 모든 것을 버렸다'며 희생정신을 강조했다.

강씨는 "일개미가 잘못해서 개미집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고통분담'은 일하는 사람에게만 돌아왔다"며 뒷맛이 쓰다고 했다.

강씨는 다행히 두 번째로 들어간 직장에서는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임금은 동결됐고 생활에 큰 도움을 줬던 회사의 복지체계는 쪼그라들었다. 그는 "회사의 복리후생 책자가 B5 종이 한 장짜리로 줄어들었다"면서 "그동안 부어가던 예금과 적금, 보험을 깨서 생활비로 쓰는 생활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다시 위기가 왔을 때 퇴출 1순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에 회사 눈치를 보며 다녀야 했다.

당시 직장인들 사이에선 '비온 뒤 청소부가 비질할 때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이 돼야 한다'는 말이 유행했다.

2005년 10월, 강씨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를 위한 국가 복지제도는 없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자발적 퇴사로 간주돼 실업급여는 받을 수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저축한 돈이 생활비로 야금야금 빠져나갔다.

"어릴 적 가족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는 회사를 믿었어요. 지금도 가족은 아버지를 믿는데 아버지인 저는 회사도 국가도 못 믿겠어요. 국가라는 큰 시스템에 기댈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혜택이란 걸 받을 수 있으려면 내 생활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야 겨우 좀 오는 거 같고요."

강씨가 기댈 곳은 대출뿐이었다. 2007년 쌀집을 개업할 때 수중에 있던 돈은 700만원. 그 밖에 8000만~9000만원은 대출로 충당했다.

어렵사리 마련한 아파트를 다시 담보로 잡혔다. "우리 집 중에서 진짜 우리 것은 베란다뿐이다." 그는 아들에게 종종 농담조로 말한다.

뉴스를 보면 빚으로 버티는 가족이 강씨만은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 금융부채는 10년 전보다 500조원 이상 증가해 937조원(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으로 가처분소득의 146%에 달한다.

강씨가 현재 지고 있는 빚은 1억5000만원. 한 달에 400만~500만원을 벌어 200만원은 금융기관에 고스란히 보내야만 한다.

나머지 200만~300만원 중 100만원은 두 아들의 학원비로 지출하고 남은 돈으로 4인 가족의 생활비와 쌀집 경비를 메워나가야 한다.

 

 

■ 커지는 빈부격차·교육비, 민주화되면 다 해결 기대 -> "국가는 늘 국민 잊었다"

그가 큰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의 가족은 빈곤의 벼랑으로 밀린다. 강씨는 그게 제일 무섭다고 했다.

특히 주위에서 추락하는 가계살림을 볼 때마다 그 공포는 배가 된다.

"저처럼 회사를 나와 자영업하는 선배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도와드릴 방법이 없더라고요. 결국 가족의 모든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더군요."

강씨는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만 "망막에 피가 고여 사흘간 입원했을 때 병원비 100만원을 내고 나니 건강보험만 믿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실비가 지급되는 민간보험 한두 개쯤은 붙들고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자영업자이기에 산재보험, 고용보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불안이 일상화돼 있다. 그의 아버지가 병까지 얻어가며 노동에 몰입한 것이 더 나은 가족의 삶을 위한 '희망' 때문이라면 그 아들은 추락할 수 없다는 '불안' 속에서 쳇바퀴를 돌린다. 이것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중산층의 멍든 현실이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면 강씨는 더욱 불안하다. 우리 사회가 점점 빈부격차가 커지고 계급이동이 어려워지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씨 부부는 다른 집처럼 두 아들의 특목고 진학을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스펙쌓기'를 시도했다가 아이가 힘들어해 중단한 상태다.

그래도 영어·수학 두 개 학원에만 보내자니 늘 불안하다.

그 자신이 회사를 믿을 수 없다는 경험을 하고도 강씨는 종종 아들에게 "너 그러다가 대기업 못가면 어떡할래"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경쟁에서 앞서려고 봉사활동도 친구와 함께 가지 않는다고 했다.

국제교육협의회(IEA)의 36개국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청소년이 관계지향성(참여), 사회적 협력(신뢰) 항목에서 0점을 받았다.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라는 얘기다. 그러나 '역전의 기회'가 없는 세대라는 것을 알기에 "두 아이의 학원비로 한달에 100만원씩, 그러니까 생활비의 절반을 써야 하는 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고 강씨는 말한다.

"애들 대학 보내고 빚도 갚아나가야 하는데 노후대책이고 뭐고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 국가 도움을 좀 받게 되면 높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나요. '당신은 혜택을 받고 있으니 고마워하라'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강씨의 가게에 임신한 젊은 부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아이가 쌀포대 위에서 까르르 웃으며 장난치는 동안 가게를 둘러보던 부부는 쌀 한 포대와 잡곡을 배달해달라고 주문했다. 손님이 나가자 강씨는 가게 입구의 책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1987년에는 민주화만 되면 정말 다 되는 줄 알았어요. 국가가 국민을 챙겨주고 그럴 줄 알았죠. 그때는 두셋만 모여도 열변을 토하곤 했는데…." 강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국가는 항상 기대를 저버리더라고요. 안 그런 적이 없어요."

 

 

강씨가 이 땅에서 살아온 46년. 이 사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는 강씨가 18살이던 1982년 1927달러에서 2010년 현재 2만759달러로 10배 이상 뛰어올랐다. 국가는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할 것"을 강조했고 국민은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묵묵히 따랐다. 그래서 경제규모로만 보면 한국은 세계 열다섯번째 국가가 됐다.

그러나 강씨는 오히려 부모 세대보다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더 나은 미래를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삶의 질을 포기했지만, 정작 강씨 세대에선 소득보다 삶의 비용이 더 커졌다.

강씨는 아버지처럼 자녀의 '밝은 미래'도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국가의 복지재정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 주변을 맴돌고, 최악의 자살률과 최악의 청년실업률, 비정규직 비율 등으로 사회 갈등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씨와 같은 중산층 국민들이 국가의 복지를 입에 올리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다.

 

서울대 장경섭 교수(사회학)는 "개발주의 시대 국가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권리를 가족의 의무로 몰고가고 방치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이 유지돼 국민이 경제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이제는 다수가 그런 참여기회를 박탈당해 밀려나면서, 국가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를 이어 일개미처럼 일했던 사람들은 화려한 경제지표와 자신의 초라한 삶을 견주면서 경제개발의 환상에서 깨기 시작했다.

'국가가 무슨 소용이 있나' '한국은 앞으로도 이렇게 굴러 가야하나'와 같은 질문이 터져나오는 것은 그 징표다.

지금 등장하고 있는 국민들의 복지욕구를 단순히 욕망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 복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지금과는 다른 한국사회를 바라는 마음에서 싹트고 있다.

< 취재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

■ 특별취재팀
최민영·송윤경·유정인·김지환·박은하 기자

 

경향신문 | 송윤경·박은하 기자 | 2011.05.08 22:18 |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