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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학가, 사상가 매월당 김시습

테마파크 2011. 1. 26. 16:57

 

<정말 근사한 건물, 그보다 근사했던 ‘불운한 천재’>

 

권력자를 ‘개자식’으로 뭉갠 사나이

 

압구정동은 지금은 사라진 정자 ‘압구정’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강을 바라보는 근사한 압구정을 만들었던 이는 희대의 모사꾼으로 불리는 정치인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조선전기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칠삭둥이였지만 정치판의 흐름을 읽어 자기의 성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수양대군을 도와 임금을 바꾸는 데 성공했고, 두 딸을 성종과 예종에게 시집보내 두 왕의 장인이 됐다. 벼슬은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 권세란 실로 대단했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아첨하기 바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사 같은 사람, 그는 역사 속 가장 마키아벨리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수양대군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난 단종을 사육신들이 복위하려 했을 때 그는 이런 움직임을 막아내고 사육신들을 살해하는데 앞장섰다. 이시애의 난으로 그의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워졌지만 그는 삭탈관직을 당한 뒤 다시 고위직에 복귀하는 퍼포먼스로 자기 입지를 지켜나갔다. 그 생명력은 실로 길고 강했다.

 

이 권력자의 글이 벽에 붙어있는 것을 본 한 사람이 있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돕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장자계승의 도리를 버리고 삼촌이 조카를 몰아내 왕이 되도록 만들어낸 모사꾼의 잘난 척 하는 글에 분노한 그는 붓을 들어 두 글자를 바꿔버린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당대의 권력자의 글에 사정없이 비판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 그 사람이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학가, 사상가였으면서도 평생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녔던 기구한 운명의 주인.

당대의 천재였지만 그는 추악한 세태를 증오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소설들을 썼다.

그가 남긴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남았고, 그의 독특한 풍모는 전설이 됐다.

 

 

진정한 자유인으로 평생을 떠돌았던 그가 인생을 마친 곳은 부여의 절 무량사였다.

무량사에 들어간 김시습은 자기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는 자기 초상화를 보며 이렇게 다짐한다. "네 모습이 지극히 약하고,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속에 너를 버릴지어다." 자신을 스스로 이렇게 가혹하게 평가한 그는 이후 무량사에서 이승을 등진다.

 

정말 근사한 건물을 만날 수 있는 곳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그 절 무량사는, 그러나 그리 널리 알려진 절은 아니다.

충청권 답사책에서도 이 절은 잘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무량사는 김시습 때문이 아니라 건물 하나 보기 위해서라도 가볼 만한 곳이다. 우리 건축의 보석 같은 건물, 극락전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담한 일주문을 따라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역시 아담한 절 무량사가 나온다.

그리고 경내에 들어서면 무량사의 간판 극락전이 범상치 않은 자태를 뽐낸다.

 

 

무량사 마당은 그리 넓지 않다. 그래서 더 극락전은 더욱 장엄하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석탑, 그리고 경쾌하면서도 육중한 극락전이 경내 전체를 압도한다.

 

 

극락전은 다른 절집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 디자인이 남다르다.

딱 보기에 2층인데, 2층의 창문 부분은 거의 없이 지붕 위에 또 지붕이 올려진 것처럼 지었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인데, 실은 안에 들어가면 한 층짜리 건물이다. 1층 앞면의 문짝 구성도 독특한 비례를 보여준다. 정 가운데 칸은 문짝이 4개다. 그 옆은 2개, 맨 가장자리는 1개. 중앙에서 바깥으로 갈수록 정비례로 숫자가 줄어든다. 그러면서도 문짝의 크기는 또 다르다. 가운데 문짝 4개는 그 크기가 양옆 2짝, 1짝보다 살짝 작다. 극도로 의도적으로 시각적 효과를 위해 디자인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여러 고건축물 중에서도 그 의미가 각별하다. 그래서 보물 356호로 지정됐다.

 

이 극락전은 실제 크기가 화엄사 각황전이나 금산사 미륵전처럼 유명한 다른 중층 건물들보다는 작다. 그래도 그 존재감은 오히려 더 강하다.

그 이유는 절 전체의 크기와 극락전의 비율에 있다. 마당을 넓게 했다면 건물은 그리 커보이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 건물이 도드라지게 공간을 배치한 것이다. 건축이란 건물 하나를 멋지고 근사하게 짓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량사에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보물이 극락전 앞 5층 석탑이다. 조금 더 분명하게 보시기 위해 자료 사진으로 올린다.

 

 

이 석탑은 딱 봐도 신라의 석탑과는 다르다. 백제 탑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탑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탑은 3층 형식으로 완성된다. 석가탑이 대표적이다. 반면 백제의 탑은 5층 형식으로 완성된다. 정림사지 석탑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저 무량사 석탑은 정림사지 석탑과 비례가 다르지만 그 느낌은 일맥상통한다. 디자인도 아주 비슷하다.

백제가 멸망한 뒤로도 옛 백제 지역이었던 충청도와 전북 일대는 건축을 비롯한 문화적 측면에선 그대로 백제의 스타일을 이어갔다.

 

그러면 ‘백제스러운’ 탑들을 비교해보자.

 

 

위 왼쪽이 백제 탑의 간판스타 정림사지 탑이다. 5층이고, 각 층의 비례가 실로 날아갈 듯하다.

위 오른쪽은 익산 왕궁리 탑이다. 역시 5층. 비례가 정림사지와는 달리 좀 넓어졌다. 그래도 아주 비슷하다.

아래 왼쪽은 비인 석탑이다. 3층처럼 보이나 5층이다. 점점 비례가 변한다. 그래도 디자인은 정림사지 것과 역시 비슷하다.

그리고 아래 오른쪽이 여기 무량사 5층 석탑. 

 

정림사지 것만 백제의 탑이고 나머지는 후대의 것이지만 그 문화적 유전자는 이어지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번 정착된 문화의 유전자는 실로 강한 힘을 지닌다. 백제는 사라졌어도 백제 문화의 유전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저렇게 전승되어 갔다.

저 작은 탑 하나는 그런 사실을 잘 웅변한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자세히 보면 탑에 작은 구멍들이 있다. 무엇에 쓰는 구멍이었을까?

 

지금 우리는 저 돌 자체의 느낌이 충만한 석탑들을 보며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느낀다. 오로지 돌로만 구조와 재료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냈다.

그러나 과연 옛날에도 그랬을까? 저 구멍들은 저 탑을 처음 만들었을 때 탑을 꾸미는 장식을 달았던 자리로 추정된다.

지금은 돌 부분만 남아 있지만 예전 석탑들은 당당한 장식으로 꾸며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남아있는 모습만 볼 수밖에 없어 우리의 미적 기준으로 문화재를 평가한다. 그러나 당대의 모습과 당대의 느낌은 분명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후대의 눈으로 보면 그런 본질은 알기 어렵다. 후대 사람들이 오해한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 서양 건축의 지존인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서양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에서 저 건물을 본 서양의 건축 거장들은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저 순백색 미학을 찬양했다.

 

백색은 ‘아무 색도 없는 색’인 동시에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이기도 했다.

백색 하나만으로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 건축 거장들이 열광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당시에도 저 신전이 단지 하얗기만 했을까?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들은 우리 건축의 단청처럼 많은 색으로 치장한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수천년 세월이 흘러 그 빛깔은 모두 사라지고 돌 자체의 흰빛만 지금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추구했던 미적 기준은 지금과 달랐다. 문화는 변하고, 또 이어진다. 순백의 파르테논을 재발견하는 것도 문화고, 백제의 문화 유전자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도 문화다. 그리고 건축이다. 천년 고찰 무량사는 비록 작은 절이지만 그런 문화의 속성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저 아담한 석탑 하나에도 그런 의미는 오롯이 담겨있다.

 

죽어서도 썩지 않았던 김시습

 

무량사가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는 사람의 삶, 그리고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김시습은 살아생전 부귀영화와 높은 관직을 결코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그가 남긴 소설을 찬양하고, 그의 철학을 존경한다. 한명회는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김시습은 충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무엇이 김시습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의 지식인 적 태도와 문학적 성취였다.

지식인이란 언제나 시대와 불화하는 존재다. 이젠 고전이 된 명저 <오리엔탈리즘>을 남긴 세계적 지성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규정한 바 있다. 그의 또 다른 명저 <권력과 지성인>에서 그는 “지식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 작용에 반응”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기가 피해를 받지 않는 한 불공정한 관습과 불의에 결코 저항하는 법이 없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보신주의 때문이다. 특히나 정치인과 기득권 세력들은 그래 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이드는 그런 이들에 맞서 진정 보편적인 것, 진정 모두를 위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래서 현실이 불합리한 것은 아닌지 늘 의심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설파했다.

 

“지식인인 한,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

 

자신을 스스로 추방하는 자,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 그가 지식인이다. 김시습은 그런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것 이상이었다. 그는 거인이면서 기인이었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당대의 부조리와 관습과는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조선 지도층에서 추방했고, 문학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김시습은 조선 초기 사람이었지만 그의 관념을 지배한 것은 고려의 정신이었다. 유교의 시대 누구보다도 명민한 유학자였음에도 그는 불교인이었고 승려였다. 엄격하고 절제적인 조선의 풍토는 그를 몸부림치게 하였다. 그는 자유롭고 욕망에 충실했던 고려의 정신으로 소설을 썼다. 그의 <금오신화>는 그런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이란 정말 딱딱하고 시험문제 내기 좋은 설명으로만 알려진 <금오신화>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가장 시대를 앞서갔던 판타지 소설이었다.

 

<금오신화>에 들어있는 다섯 소설 중 하나인 <만복사저포기>는 보잘것없는 떠돌이 청년이 만복사란 절에서 내기에 이겨 신부를 얻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는 어떤 귀인의 죽은 딸이었다.

 

떠돌이 총각과 계급 높은 귀인의 딸이 맺어진다는 이야기는 계급에 투철했던 조선의 가치관으로 볼 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유로운 연애가 성행했던 고려의 관점에선 불온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죽은 귀신과의 사랑을 나눈다? 인간과 귀신의 섹스? 당대의 지식인이 이런 글을 쓴 것은 지금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조선이란 사회를 감안하면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김시습은 `마지막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무량사에서 말년을 보낸 김시습은 1493년 세상을 떠난다. 쉰아홉살 때였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을 화장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의 유언대로 3년 동안 시신을 놔뒀다. 그리고 장사를 지내려 관을 열었는데, 그의 주검은 썩기는커녕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교식으로 화장을 했다. 화장한 뒤 뼛가루 속에서 사리가 나왔고, 그 사리를 무량사 바로 아래 부도를 세워 모셨다.

 

 


무량사 구경을 마쳤으면,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떠나지 말고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와 오른쪽 김시습의 부도를 만나보자.

저 많은 부도 가운데 우뚝 선 나름 모양낸 부도가 이 희대의 천재이자 기인이자 지식인의 부도다.

 

저 김시습 부도는 그 모양도 디자인 측면에서 흥미롭다. 윗부분을 분리해서 따로 놔도 부도가 되는 디자인이다.

그 앞에 검은 돌로 작은 비석을 세워놓은 것도 눈에 띈다. 불교 부도에 유교식 절충형으로 세운 비석이랄까.

 

저 검은 비석에는 ‘오세 김시습’이라고 적힌 글자가 눈길을 끈다.

김시습은 ‘5세 신동’이었다. 그가 다섯살 때 세종대왕은 이 신동을 불러 얼마나 뛰어난지 알아보고 감탄해 그를 ‘오세’라고 불렀다.

김시습은 평생 다섯살 적 순수한 감수성이 유지되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왕이 내린 별칭이지만 ‘다섯살’이란 별칭은 그 자체로 너무나 천진한 느낌이다. 언제나 자유롭고자 했던 김시습, 그래서 방랑자가 되었던 그는 이곳 무량사에서 영원한 존재로 남아있다.

 

글 / 구본준 기자

 

한겨레 | 2011-01-26 오후 01:41:52 | 구본준 기자 |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