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행위자(독재·친일부역)

‘친일인명사전’-친일파 청산의 역사적 의미

테마파크 2010. 3. 15. 19:18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맡지 않으면 않된다."


새날 희망연대 3월 모임에서 민족 문제 연구소 임헌영 소장님의 "친일파 청산의 역사적 의미" 라는 주제로 발제 토론이 있었습니다.

너무 귀한 말씀이기에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문을 올립니다.

 

1. 과거사 청산이란?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맡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을 감는 것이다" 도이치 대통령 바이체커가 1985년5월8일 나치 패전 40주년을 맞아 한 말이다.

정작 도이치는 이런 말이 나왔을 때, 아니 훨씬 이전에 전후 처리와 청산을 어느 정도 실현한 처지였고, 그래서 정치가나 국민 모두가 쓰라린 역사 앞에 떳떳이 설 수가 있었다.

 

철학자 칼 아스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팔장을 끼고 구경만 했다면 이것은 바로 자신의 죄라고 생각한다. 그런일이 벌어진 다음에도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돼 나를 덮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참회와 임무를 강조한 말이다. 반대이유의 첫째가 세계화 시대를 맞아 구시대의 역사를 들추는 건 퇴행적이라는 주장이다. 

 

세계화란 술어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세계2차대전 후 과거 청산을 어떻게 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프랑스는 나치 협력 혐의조사  대상자 200만명, 체포 99만, 수십만의 공직, 군부 장교의 해직, 6천 7백여 명의 사형선고, 종신 강제 노동 2천 7백여 명, 유기징역 2만 6천여명, 공민권 박탈 3천 6백여명 등 등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프랑스 전인구 10만명당 94명이 교도소에 갇힌 꼴인데, 이것 조차도 오히려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는 것이다. 

 

즉 덴마크는 인구 10만명 당 374명, 네델란드는 419명, 벨기에는 569명, 노르웨이는 633명이었다. 

 

역사학은 오늘의 유럽 민주주의가 정착하여 사회복지를 이룩한 바탕에 이런 나치처리의 철저성때문에 가능했다는 데 거의 다른 이견은 없다. 물론 현대 유럽을 인류의 유토피아로 보거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냐는 문제는 다른 논란을 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위에서 현존하는 여러 정치 체계 중 인도주의가 상대적을 잘 실현되고 있는 지역이란 점에서 동의할 것이며, 이런 취지에서 볼때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처리가  얼마나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문제는 과거 청산에 그치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국민국가 사회의 안정에 필수 불가결의 요인임을 느끼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나치나 친일파 등이 깨끗이 청산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은 피상적인 것으로 오히려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하여 철저하지 못했던 데다가, 사회주의 체제 자체가 지닌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유사한 독재 체제였기 때문에 겪게 된 경제적 정치적 낙후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2. 친일파의 철학

 

해방 직후 있을 법했던 친일 민족반역자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지금 되돌아 보면 새삼 사르트르가 마치 우리를 위하여 "협력자는 무엇인가" 를 쓴 듯이 착각을 일으킬 만큼 피점령 상태에서의 민족적 상황과 고뇌에서 비슷한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미군정 아래서 입법의원이 열렸을 때 부터 우리는 막연한 "친일 매국 반역자"가 아닌 '협력자'의 의미를 따지기 시작했다. 당시 입법의원에서 처음으로 이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한 기초위원들이 본 친일 민족반역자의 개념과 숫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일협력자는 전국민의 약 0.5%로 약 10내지 20만명, 민족반역자 약 0.003%로 천명내외, 전범자 약  2,3백명, 간상배 약 0.005%로 1, 2만명, 이래서 초안자들은 대개 25만명 정도를 부일협력, 민족 반역자의 범주에 넣었다.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이라 이름한 이 법은 협력자의 개념 규정에서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일본에 붙어서 민족을 해한 자" 라는 구절이 애매하여 누구나 친일분자로 걸릴 수 있고 또한 누구나 교묘히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등의 논란과 수정을 거듭하면서 간신히 입법의원을 통과하였으나 미군정의 외면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입법의원에 임석했던 하지 중장은 친일파의 처벌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의원에게 "친일파의 숙청은 여러분 조선사람이 할일이고 미군으로서는 관여할 바가 아니다" 고 답변했다고 전한다.
사실 친일파의 숙청은 외국군에게 협조를 의뢰했다는 그 자체가 지금 보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일찍이 간파할 수 있었던 계기가 이때에 이미 이룩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더구나 그 이후 제헌국회에서 제정 통과된 반민법의 운용과 그 귀결을 보면 미일유착과 한반도의 운명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당시 반민특위 제1조사부장 이병홍의 "반민자의 심정"이란 글은 오늘의 독자들에게 끔찍한 느낌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방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의 집에서는 "일본황제의 사진이 벽상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어떠한 자는 태연하게 우리들의 앞에서 이완용의 위대한 민족애를 강조하고 동상 건립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어떤 자는 장차 우리들이 저들 팡에 심판받을 날이 불원할  것을 오연히 말했다." 고 쓴 이 필자는 "그들은 불원간 일본이 반드시 이땅에 재군림한다는 것을 마치 크리스트의 재강림을 믿는 기독교인과 같이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그들이 무슨 형상 있는 결사를 가졌는지 아니 가졌는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려우나 지금 마치 옛날 관북지방의 여진족과 같이 그들끼리 공작하고 그들끼리 여론을 통일하고 그들끼리 그들 독특의 시국에 대한 전망을 하는 흔적이 있는 것은 세인 주지의 사실이다. 
불원간 동양의 풍운이 급하고 반드시 일본의 대군이 이 나라에 상륙하게 될 것을 그들은 몽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옛날 상전 혹은 친우를 만나서 손을 붙들고 해후의 감회를 말하면서 비단 보자기에 싸두었던 "교육칙어" 와 "폐하" 의 사진을 끌어 내어 자기들의 송죽같은 충절(?)을 표시하려는 심산이 아닌가 추측된다. 
 


동포여! 이것이 친일파다. 이것이 친일파 사상의 일편이다.
이러한 사상은 어느 개인의 특수한 소유라고 규정지어질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적어도 사상이라는 것은 일정한 사회적 근거위에서 생기는 관념인 것이다.
그 정조의 농담은 문제 외로 하고 이 가공할 사상은 오늘 친일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해방이후 일본의 미래를 가장 정확하게 예견했을 성 싶은 이 글은 끝으로 이렇게 충고한다.
"그들은 그들의 조국 일본이 다시 동양의 헌병으로서 대륙에 건너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 이며, "우리는 정치, 경제, 문화 백방에 대하여 이 나라에서 식민지를 그 최후의 일편까지 청소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참으로 '본국' 될 수 없을 것이며 문명과 행복과 민주주의에서 영구히 절연될 것이다." 

 

3. 친일파의 개념 설정

 

(1) 전범자로서의 친일파(전쟁지지, 지도급 인사), 고유 전쟁범죄(전쟁 중 각종 행위 등), 평화, 인도에 대한 범죄(인도주의 원칙 위배자), 이 세가지 범주로 보면 도쿄재판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2) 사상적으로 본 친일파 : 사르트르의 <협력자는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프랑스 협력자가 우익 무정부주의자라 함.

외세 의존적 개화 - 민족 개량주의 - 근대화 론 - 독재옹호 - 분단옹호 - 세계화 추구 - 강대국 침략전쟁 지지 - 예 이광수의 대동아 문학자 대회 제1회(1942년) 3회 참가, 二重橋 앞에서의 충성심, 중국작가와의 대비.

 

(3) 인격파탄자로서의 친일파 : 부정 부패형 인간상

참고 : 임헌영 평론집 [민족의 상황와 문화사상](한길사) 중 <신친일 문화론>

         민족문제연구소 [한국근현대사와 친일파 문제](아세아문화사) 2000년


# 친일, 일제 잔재 청산의 현대적 실현 과제

- 정치적 청산과 법률적 경제적 청산 / 교육 문화적 청산 / 역사적 청산 / 일본에 대한 동등권의 확보 동아시아 평화 구축 / 민주주의와 통일운동 / 민족경제의 인식 / 민족문화의 가치관 확립 / 반전(반침략) 평화 운동의 이념 / 인류 공존의 정신 / 복지사회의  건설 등.


#[친일인명사전] 반대논리에 대한 의견
-
국론분열론에 대한 반박 : 이 사전이 완수되면 그 연속선상에서 광복후 친일파와 유사한 반민족적인 행위를 다룰 수 있는 인명사전도 나와야 한다.

 

4. 친일파의 변모

 

김달수의 소설 [태백산맥]은 일제 말기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독립운동가가 불과 1년도 못가서 다시 갇히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만세의 함성이 사라지기도 전에 친일파는 재등장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란 죄목으로 잡아들이는 형국으로 바뀐 정세를 묘파하고 있다.

 

현상고착화를 위하여 미군정이 한반도에 내린 첫 명령은 '일인 관리의 유임'이었다.
최상용은 [미군정과 한국민족주의](나남 1989년)에서 국무부의 8월 26일자 "대일훈령을 적당히 손질하여 한국에 적용하는 것, 즉 미군정장관의 지시하에 조선총독 및 그의 일인참모진을 한국의 행정에 활용한다는 것이 기본 계획임에 틀림없다는 점" 을 분명히 밝힌다.

 

물론 이런 계획은 강력한 반대 여론에 밀려 9월 14일 경 미국으로부터 일본인과 한국인 부역관리의 해임 촉구를 권고받지만 현지 사령부는 정면 거부, "유능한 한국인들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인의 비호하에 고위직에 기용되었던 한국인들은 친일파로 간주되어 대부분이 일본인들 못지 않게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는 국무성 파견원 배닝호프의 보고서가 시사하듯이 형식적인 해임절차만 거쳤지 사실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이런 현상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인들을 무한정으로 환직시키고 유임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박태균)고 할 지경이다.

 

"일인 도지사와 그 측근들이 한국민중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그들이 좌익분자에 대한 최선의 방파제를 제공해 줄 것"[한국현대사의 재조명](돌베개 1982년), 중 미드의 '미군정의 정치경제적 인식' 이라는 대목은 모든 정치적인 복선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한국에서의 반대여론으로 수정하는 듯하면서도 그 골격은 유지한 채 일제 통치 시기의 각종 법률과 행정체계 역시 현상유지책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일인들은 귀국해야기에 관리 충원은 불가피 했다. 
미군정의 관리충원 원칙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충실할 수 있는 인물" 을 첫째 조건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에서 반공을 불가결의 요인으로 삼는 기본 자세가 굳어 졌는데, 주의할 점은 일체의 사회주의 세력을 구분하지 않은 채 '친소적' 집단으로 간주한 사실로 , 이로 말미암아 교조적이며 도식적인 냉전체계의 한국적 반공의식이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국 근무 선교사의 아들 윌리엄스 대령은 원세훈, 송진우, 조병옥 등 한민당 인사들과 회동, 경무부장인선의 기본이 곧 공산주의 이론에 투철하고 반공사상에 철저한 유능하고도 실천력이 강한 애국인사여야 함을 강조한다.

 

미군정의 두 번째 한국인 발탁조건은 실용주의적 능력인데, 여기에는 영어구사 능력이 그 초점이다. 이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만한 인사들은 구미 유학파들이었으며 그들은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하기에 거의가 친일파거나 그 자제들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위의 두 가지 조건은 곧 미군정의 관료 등용 요건은 친일파의 재생 기회임을 천명하는 것이나 진배없었으며, 이는 한민당과 미군정의 밀착으로 더더욱 굳건한 현실성으로 고착되었다. 친일파란 거의가 부유했으며, 일제 치하에서 극렬한 반공의식에 불탔고, 변혁에 반대였는데, 이게 미군정이나 미국의 대외정책 등과 너무나 찰떡궁합이었다.

 

한국인중에서 미국의 동조자를 선발하기 위하여 미군은 공식적인 진주 이전인 9월 6일 선발대가 여의도로 입성, 그중 "찰스 해리스 준장은 조선총독부, 조선군 관구 사령부, 진해경비사령부 등에서 선발된 일본측 요원과 협의, 이후 엔도 정무총감, 미즈다 재무국장, 이토 체신국장 등등 중요 일인 관리를 두루 두루 만나 협의했다(박태균). 이때 총독부는 [조선시정사정일반], [조선총독부로부터의 희망사항] 등 자료를 미군에 건넸는데, 가장 중요한 요점은 "불량자들(한국의 민족해방 운동가)이 미,일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주의하기 바란다"는 사실이다.

 

미군은 이외에도 경찰과 헌병측 자료로 인수받았는데, 거기에는 일제하에 다뤘던 관련자 70만명의 지문도 포함된다.
지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죽하면 하지가 "일본이야 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라고 할 지경으로 친일파 재생과 육성을 위한 모든 기본 조건이 미국에 의해서 이미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군정의 두번째 정보 제공자는 근대이후 면면히 전통을 이어온 미국인 선교사들이다.
연희전문 창립자인 H.G.언더우드의 아들인 H.H.언더우드는 하지중장과 아놀드 군정장관의 고문으로 미군 철수 후의 한국인에 의한 친미화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설계한 중요한 인물의 하나이다. 윌리엄스는 공주에서 선교사활동의 일환으로 영명학교를 설립했는데, 일제로부터 출국조처(1940년) 8. 15. 후 미 고문으로 돌아와 인사조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영명학교 출신자를 발탁시키는데 앞장섰다.
조병옥 경무부장, 초대 충남도지사 황인식, 2대 지사 박종만은 다 영명학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세번째 인사문제의 영향세력미군정기관의 각종 고문위원회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인데, 비난 여론 때문에 흐지부지 되었으나, 송진우, 장덕수 등 한민당의 입김은 여전히 막강했고, 지방에는 공공연하게 친일파 고문위원회들이 힘을 발휘하게 되어 친일파의 등용문이 활짝 열렸다.

 

미군정의 부장 경력을 중심한 인사와 도지사 부윤 인사들의 경력적 특징을 박태균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다년간 해외유학 출신자들인데 그중 미국유학이 압도적인 다수이다.
두째는 숭실, 연희 등 기독교계 학교 출신자거나 이런 계통의 학교에서 교직을 지낸 경력이 두드러진다는 점과,
셋째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참여했던 인사들이란 사실이다.
여기서는 관리 등용의 극히 일부분만 다뤘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친일파의 재등장은 비슷한 유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의하여 추진된 교육정책은 이후 친일파의 친미화를 정착시켜 1950년대 이후 한국의 이데올로기를 재창출하게 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박태균의 [8.15. 직후 미군정의 관리충원과 친일파], [역사와 현실], 10호, 임대식, [1950년대 미국의 교육원조와 친미엘리트의 형성], 역사문제연구소 편,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역사비평사 1998년).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 http://cafe.daum.net/antimb

 


 


 

 

 [인터뷰]‘친일인명사전’ 펴낸 임헌영 “후손이 반성해야”

 

“조상의 친일을 후손이 인정해야 역사청산 이뤄진다”

 

18년에 걸친 작업 끝에<친일인명사전>이 지난해 11월 8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친일인명사전>은 사람들 앞에서 출생
신고를 하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장소를 옮겨서 열어야 했고, 문화계 인사들이 탄생을 축하해주려고 마련한 ‘친일인명사전 발간 기념 축하 한마당’은 아예 연기됐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장소를 대관해주기로 한 곳에서 갑작스레 ‘대관 불허 통보’를 내면서 벌어진 일이다.

본편 3권과 발간약사 1권 등 총 4권 3000여 페이지에 4370여 명의 친일파 행적을 담은 이 책은 왜 이토록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을까?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여전히 친일파 청산을 통한 민족정기 정립을 주장하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
소장을 만나 그의 주장을 들어보았다.

 

 

“친일파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존재”

지난해 12월 31일 자택에서 만나본 임헌영 소장에게 제일 먼저 ‘친일인명사전 발간 기념 축하 한마당’ 연기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전날 진행하려던 행사
가 취소된 심정을 물으니, 뜻밖에 담담한 모습으로 답변했다.

한국문학평화포럼에서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을 축하해주려고 마련한 자리였는데, 처음 대관을 약속한 조계종 측이 갑자기
내부 행사가 잡혔다면서 대관 불허 통보를 전했다. 이런 경우 조계종이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위약금을 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까지 모두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결국 행사를 연기하게 됐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임 소장은 언급했다.

임 소장은 두 번에 걸친 갑작스러운 대관 불허가 바로 ‘친일은 현실’
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된 뒤 ‘친일’이라는 말만 들어가도 종교단체의 장소마저 대여가 안 되는 현실이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에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는 임 소장은 “오히려 이번 대관 불허 통보가 ‘친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묻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온갖 오해 속에 발간…이데올로기 편향은 없다”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 편향적으로 집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은 학문적 연구 결과” 라고 잘라 말했다.


“친일인명사전의 출간으로 소문으로만 떠돌던 것이 학문적 노력을 거쳐 객관성의 옷을 입고 현실이 됐다”고 짧게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의미를 언급한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되기 직전까지도 막연한 선입관 때문에 ‘~는 빠졌을 것이다’ ‘~과 관련한 자료는 빠졌을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번에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광복 이후 사회 현상의 연구 결과물 중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학문적 연구이고 학문으로 평가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소견을 밝혔다.

임 소장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민족문제연구소를 둘러싼 오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 바로 ‘특정 정파 또는 정권’을 위해 일한다는 비판이다. 몇 년이 지나도 끊이지 않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임 소장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행위 청산에만 목적을 둔다”는 사실을 수시로 강조하는 한편, 선거철에 몰리는 문의 전화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지켜가는 중이다.

이렇듯 온갖 곡절을 겪고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여전히 자신만의 발걸음을 우직하게 옮기고 있다. 특히 올해는 준비 중인 <일제강제침탈사>의 대략적인 윤곽을 잡고 일부라도 발표해, 40년 가까운 일제치하 기간 동안 발생한 인명·문화재·자원·재산 등의 손실을 공개할 계획이다. 또한 <식민통치사료>도 올해 정리하고, 재정적인 문제로 답보 상태를 거듭하는 ‘역사자료관’의 건립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친일파 후손의 조상 감싸기…“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임 소장은 인터뷰 도중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에 대해 언급했다. 자기 조상이 지은 죄에 대한 글을 써 급제를 한 뒤 부끄러움에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김삿갓처럼, 우리나라 친일파 후손들도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친일 행위는 분명한 범법 행위인데, 어째선지 우리나라에서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더 잘살고 있다”고 개탄한 임 소장은 “직접적으로 친일을 했던 이들이 고령으로 거의 다 사망한 지금,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친일파 후손들의 적극적인 시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이 우리나라에서 지지부진한 이유는 뭘까?

임 소장은 이에 대해 “친일파들을 옹호하는 저항 세력의 존재, 친일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한 친일파끼리의 상호 연대와 옹호, 반성하지 않는 친일파 후손의 태도 등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친일 청산의 발목을 잡았다”고 언급하고, “유럽은 정치와 법률을 통한 징계, 경제적 박탈, 나라를 배신한 이들의 말로는 알려주는 국민교육 단계, 역사학적 단계 등 4단계를 거쳐 민족정기를 세우는데, 우리나라는 이번 친일인명사전 발간으로 4단계부터 시작하는 형국이다”라고 개탄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엇보다 국민의 힘이 중요하다고 임 소장은 주장했다.

“국민이 힘을 합쳐 세 가지 정도만 해 주면 친일 청산에 큰 몫을 담당하는 것”
이라고 전제한 임 소장은
▲독립운동의 가치 재발견, 그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이 민주주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줄 것과
▲주변의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가치를 재정립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들을 기리는 행사에 국민의 세금이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
▲올바른 삶의 지표를 세울 것
등 세 가지를 국민에게 당부했다.

현대문학에 대한 평론을 공부하다 문학과 역사의 밀접함을 깨달았다는 임 소장은 “친일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파시즘 철학과 사대주의가 존재하는 한 남북통일도, 동아시아 평화도, 민주주의 정착도 모두 요원한 얘기”라고 경고했다.

대학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문학단체의 회장을 맡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직을 역임하면서도 짬짬이 쓴 문학평론이 어느새 책 15권 정도의 분량이 됐다는 임 소장은 올해 칠순을 맞아 지금까지 해왔던 개인 작업들을 정리하는 개인 저술 활동에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CNB저널 152호 김진성 기자 / 2010-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