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대통령 만주군 ‘혈서(血書)지원’ 사실로 밝혀져
그간 말로만 전해지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발굴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1월 5일,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만주신문』기사에 의하면 박 전대통령은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재차 응모한 것으로 나타난다.
편지 내용도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 등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박전대통령은 세 차례의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다.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연구소가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가 지난 10월 28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지가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관련 보도가 나간 뒤 연구소에는 욕설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연구소는 특정 정치인의 입지와 무관하게 1991년부터 편찬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도 해방 이후 60년이 넘도록 미결 상태로 끌어왔던 친일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학문적 정리를 마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듯이 왜곡하는 일부 의견에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근거 없는 비난을 방치할 때 민족사 정립이라는 대의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전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 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계
한편, 박지만 씨는 4일 북부지원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를 추가하여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제출한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의 요지는
“1. 박정희는 만주군이었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며,
2. 만주군의 주적은 마오쩌뚱의 팔로군이었으므로 박정희는 만주국의 용병이 되어 중국공산당과 싸운 셈이며,
3.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1.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2.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가 군관을 거듭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4. 엄밀히 말해서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적국의 장교이다.
5.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으로 볼 수 없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으로 이해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변론을 준비 중이다.
연구소는 혈서지원 『만주신문』기사와 함께,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만주신문 게재 기사 번역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 등록일: 2009.11.05
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 “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친일 행적’ 신문 공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9년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써가며 만주국 군관을 지원한 사실이 당시 신문 보도로 확인되면서, 만주국군으로 있었던 그의 일제 말기 행적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8일 내놓을 <친일인명사전>에서 에이(A)4 4쪽의 분량으로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연구소 쪽은 다만,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전의 속성을 감안해 박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혈서 지원’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이듬해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에서 전체 240명 가운데 15등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 과정에는 대구사범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 등의 도움이 있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박 전 대통령이 군관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 과정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며 “그가 혈서까지 썼다는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42년 3월,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받는 우등생 5명 가운데 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2개월 간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
하기 직전인 1944년 6월말 일본군 소조(상사에 해당)
복장을 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같은 해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뒤 관동군 제23사단에 배속됐다.
같은 해 7월에는 만주국군 제6군관구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서 팔로군 공격 작전에 가담했다.
8단은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과 맞서 싸운 부대다.
조 사무총장은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의 유족들은 일본군이 아니라 만주군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에서 학교를 마치고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으로 임관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예비역 소위는 일본군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사실상의 일본군 신분”이라고 지적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나타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
박 전 대통령은 1945년 7월 만주국군의 중위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그가 속한 제8단은 둬룬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17일 싱룽에 집결했지만, 이곳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중국 팔로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박 전 대통령은 제8단을 따라 베이핑으로 간 뒤 이곳에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핑진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이어 1946년 4월 핑진대대가 해산한 뒤 톈진항에서 미국 수송선에 몸을 싣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 한겨레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때 “죽음으로 충성” 혈서 사실로
민족문제연구소, 당시 신문 공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냈다는 당시 신문 기사가 발견됐다.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박 전 대통령의 ‘혈서 지원’이 객관적 방증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친일인명사전>의 전면 공개(8일)를 사흘 앞둔 5일, 이 사전에 친일인사로 수록된 박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이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 편지 등을 보냈다고 보도한 당시 <만주신문> 기사를 함께 공개했다.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만주신문>은, 1939년 3월31일치 7면에서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게재·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논란이 정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 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 사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 7면 기사 전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중략)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해도 자격 연령이 16살 이상 19살까지이기 때문에 23살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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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書▶◁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
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へ朝鮮慶尙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校訓導朴正熙君(二三)より熱烈なる軍官志願の手紙が戶籍騰本、履歷書、敎練檢定合格證明書とともに"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と血書した半紙を封入、書留で送付されて?く係員を感激せしめた、同封の手紙には
(前略)
日系軍官募集要綱を拜讀しますと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甚だ僭濫にて恐懼の至と存じますけれども御無理を申しあげて是非國軍に御採用下さいませんてせうか
(中略)
日本人として恥ちざつだけの精神と氣魄とを以て一死御奉公の堅い決心でこざいます。しつかりやります。命のつ?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中略)
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
(後略)
とペンで達筆に認めてあり同君の軍官志願の手紙はこれで二度目であるが軍官なるには軍籍のある者に限られてをり、軍官學校へ入れるにしても資格年齡十六歲以上十九歲であるため二十三歲では年が多過ぎるので同君には氣の毒ではあるが鄭重に謝絶することになつた=寫眞 朴君
/ 한겨레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박정희 만주군에 혈서지원'…옛 신문기사
◆ 민족문제硏 "불필요한 논란 확대 막으려 공개"
`친일인명사전'에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이 실리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이는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혈서까지 쓰며 지원했다는 내용의 옛 신문기사가 5일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하면서 서류와 함께 혈서를 써 냈다는 내용이 담긴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 기사의 사본을 공개했다.
연구소가 공개한 기사는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 기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1939년 재차 응모하며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와 함께 제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기사에는 또 박 전 대통령은 동봉한 편지에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라고 썼다고 돼 있다.
연구소는 "박지만씨가 10월28일 부친 이름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고 판단했다"며 "박 전 대통령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사료를 공개해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라고 기사 공개 배경을 설명했다.
또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복무했기 때문에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박 전 대통령을 포함한 것은 정당한 판단이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 2009.11.05 임형섭 기자 | hysup@yna.co.kr
[네티즌 의견]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으로 징집된 후 탈영하여 몇천리를 걸어 독립군에 합류했는데 박정희는 교사를 하다가 일본군 장교가 좋아서 재발로 찾아가 혈서까지 썼답니다. 박정희가 모델로 삼았던 이종찬 초대 참모총장은 일본군 장교였던 자신의 과거를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며 참회하며 살았고, 박정희는 반성은 꺼녕 형인 박상희의 영향으로 군내에서 좌익 활동까지 하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장도영 국군 방첩대장에게 군내의 좌익분자들 명단을 넘겨주는 댓가로 자신은 살아 남습니다.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헌도는 어느정도 인정해야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런 사람이 해방조국의 대통령까지 했다는 사실 자체는 참 부끄러운 일...
-> 지독한 야심가라고 할 밖에... jiji님
5.16혁명을 일으키고 나서 정권을 잡았으며 그 때부터 친일파는 득세를 하게됩니다.
지금도 친일파족속들이 득세하고 있지요.하루 속히 친일잔재는 사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식된 도리라고 나불거리는데 그럴수록 친일행각은 더욱 보여지게 됩니다.
니 애비 때문에 고통받고 죽임당했던 수백 수천명의 선량한 국민들에게 무릅꿇고 사죄해라!! 육영재단 재산 모두 국가에 반납해라.
감히 어디서 대통령 해먹겠다고 지룰이냐? 국민들의 고통으로 누렸던 온갖특혜를 반성하고 국민과 조상앞에 무릅꿇고 용서를 빌어라
그시절 나라 위해 얼마나 고생들 많으셨을까. 우리 역사를 알고 싶으면 조정래의'아리랑'을 읽어 보길.
"일본인 으로써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 기가 차구나...
그러니 친일로 나라팔아먹은 자들이 그 자식들과 함께 잘먹고 잘사는게 이상한게 아니구나...
그런줄도 모르고 박정희 죽었을때 눈물을 흘렸으니 나의 우매함에 한숨만 나오는 구나...
오늘 독립운동가 이동녕선생 생가를 돌아보면서 조국을위해 헌신하신분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고 친일매국한놈들은 묘자리며 남겨논 재산으로 후손들 배불리살고 완전히 민족정기가 썩었어요.
박정희의 공과가 있지만 역사남는 기록이란 객관적이고 사실적이어야지요.지만씨 심정이해하지만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은 잘못된겁니다.
친일행적도 인정하고, 근대화와 산업화의 공로도 인정해야 합니다.인정하지 않으려 하면 모순에 빠집니다.
보수단체나 반공을 외치는 이들은 자가당착에 빠집니다.국가유공자 지위를 받았다고 외치는 이들은 할말이 없어지죠.
독립운동가의 정체성도 없어지고,독립운동가가 비정상인이고, 친일인사가 정상인이 되니까요.
뉴라이트 논리에 맞추면 맞죠.힘의 논리가 중요한 사대주의자가 맞는지 자주성과 독립성을 중요시 하는게 맞는지 묻고 싶네요.
친일행적을 부끄러워 하고 반성하는 것 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친일을 했지만 후에 조국근대화에 기여한 점은 다른 측면에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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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의견]
당시 박정희 청년선생님은 말이지요..1 togul21님 16:36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조선의 역사와 애국가, 그리고 우리글을 학생들에게 가르친 훌륭한 선생님이었음이야..
이것은 많은 증언, 기록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으니 두번 말이 필요없는 것이 되겠다..
조선인을.. 조선학생을 능멸하는 것에 울분하여 일제 교장을 쥐어박아 버릴 만큼 혈기 왕성한 청년 박정희 선생님이셨지..
당연히..일제의 서장, 교장 등 관리들과 원한을 졌으니 그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겠다는 울분도 있었을 거고..
따라서 방편으로 쓴 혈서가 무신 친일의 증거가 되겠으며..
친북좌파 떨거지들의 모임인 민족파괴 연구소 놈들이 애매한 친일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대한민국을 엿먹이기 위한 빨치산식 협잡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그러니 민족파괴 연구소 놈들이 쥑일 놈들이라는 것이야.
박정희 전 대통령, 혈서 쓰고 만주군 지원…신문 공개
친일인명사전 등재 두고 논란 일자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 반박
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지원 당시 상황을 설명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했다.
신문기사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동봉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왼쪽 붉은 색 선 안이 문제의 기사 내용.
오는 8일 공개되는 친일인명사전에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이 실리는 데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뒷받침하는 신문 기사를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연구소는 5일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실린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개했다.
지난달 28일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가 부친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게재되는 것을 막아달라며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낸 데 대한 공식 반박인 셈이다.
연구소 측은 박 씨의 가처분신청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진데다 정치 쟁점화되고 있다고 판단해 신문기사 사본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또 공개한 신문 기사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라고 언급하며, "(친일인명사전 게재에 대한)불필요한 논란 확산을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문제가 된 신문은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을 감격시켰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이 썼다는 혈서에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보도 사실과 관련해 연구소 측은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복무했기 때문에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명하며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을 친일인명사전에 올리는 것은 정당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 뉴스한국 | 2009-11-05 | 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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