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암살 배후 평생 쫓은 고 권중희 선생 1주기 글쓴이: 권오진(추밀공파 35세) /2008.11.19
11월 16일 12시에 남양주 마석에 위치한 모란공원에서는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끝까지 추적, 자백을 받아냈으며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저술한 '애국지사 고(故) 한길 권중희 선생 1주기 추도식'이 거행됐다.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 조사위원장과 민족정기구현회 회장으로 활동한 권중희(사진, 權重熙 1936년 경상북도 안동 ~ 2007년 11월 16일)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사건 배후를 밝히기 위해 약 50년 동안 추적해온 사회운동가로 2007년 11월 16일 오후 5시경 향년 72세를 일기로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당시 '최소한의 염치도 양심도 없는 한나라도당은 각오하라!'는 제목의 글을 쓰는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사회장으로 추모식을 지내고 20일 발인, 21일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권중희씨는 1981년, 안두희가 백범살해를 부인하는 인터뷰를 하고 미국도피를 위해 여권을 발급받자 직장을 그만두고 백범살해의 배후를 쫓기 시작해 1987년 3월 서울 신촌에서 '안영준'이란 가명으로 숨어 살던 안두희를 찾아내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때려 옥고를 치렀으며 92년에는 인천에 살고 있던 안두희를 납치, 남양주 마석을 거쳐 가평 근처 폐가로 끌고 가 자백을 받는 등 안씨를 추적하고 백범의 암살 배후를 밝히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04년 2월 2일부터 3월 10일까지 '백범선생 암살 진상규명 방미 조사단'을 꾸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등을 방문해 진상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 날 추도식엔 유가족들과 홍갑표 민족정기보존회 회장, 박기서, 윤한탁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상임대표, 범민련 서울시 연합의장 노수희, 남양주 지역 시의원 이광호, 추모시를 지어 헌시한 새벽 안택상 시인 등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생전의 업적에 비해 초라하게 이뤄졌다.
민족정기구현회가 주관하고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범민련남측본부, 유가협 등에서 후원했다.
의기에 안두희를 때려죽인 택시기사 박기서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한 뒤에 숨어 지내던 안두희는 백범 암살 후 47년의 세월이 흐른 1996년 10월 23일 오전 자신의 집에서 끝내 피살된다.
오전 6시, 안두희(당시 79살)의 피살 용의자 박기서(당시 43살)는 민족정기구현회의 권중희에게 "안두희를 처벌하겠다"라는 전화를 했으며 오전 11시 30분 안두희의 동거녀 63살 김명희가 수퍼마켓에 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아파트 안으로 밀고 들어가 안두희를 준비해간 방망이로 살해했다.
그리고, 11시 40분에 "이런 사람은 살려둘 수 없다. 안두희를 죽였다"라고 권중희에게 다시 전화했다.
그 후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 한 성당에서 자수한다.
경찰조사에서 "안두희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온 권중희 선생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에 감명 받았으며 지난 6월 백범 선생 추모식에 참석한 뒤부터 안두희를 단죄하기로 마음먹고 미리 계획을 세워왔다"고 밝힌 박기서는 연행 당시와 마찬가지로 "의로운 일을 실천해서 당당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는 검거 후 1997년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돼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98년 3월 13일 단행된 정부의 대통령 취임 경축 특별 사면 복권조치에 따라 이날 오후 청주교도소에서 석방됐다.
박기서는 추도사를 통해 "'안두희 같은 반역자를 처단해야 하지 않겠나'하는데 의견을 나누며 뜻을 같이 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역사에 열정을 갖고 있었던 권중희 선생에게는 굽히지 않는 철저한 투쟁정신이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한 우국지사의 못다 이룬 꿈
오마이뉴스 | 입력 2007.11.18 박도 기자
오늘(11월 17일)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나는 격주 토요일이면 횡성고등학교 학생 논술 지도를 한다.
오늘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학교로 가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횡성버스터미널에서 12시 50분 안흥행 완행버스를 타고 마을 앞 정류장에 내린 뒤 내 집까지 1km 남짓한 길을 터덜터덜 오돌오돌 떨면서 걸어오는데 손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이는 < 오마이뉴스 > 구영식 기자로, 뜻밖에도 권중희 선생의 운명 비보를 전했다.
구 기자는 나와 권중희 선생의 인연을 상기시키며, 추모 기사 한 꼭지를 부탁하는 듯했다.
10여 분 걸어오면서 지난날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뒤 곧장 컴퓨터를 켰으나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장면과 생각들이 떠오른 탓이리라.
▲ 고 권중희 선생 백범 시해 현장인 경교장
(현재 강북 삼성병원 본관) 앞에서 ⓒ 박도
첫 추위에 몸을 너무 움츠린 탓으로 따뜻한 방에 들어오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두어 시간 눈을 붙이고 나자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 오마이뉴스 > 로 들어가 지난 연재기사에서 '박도의 < 의를 좇는 사람 > '을 찾았다. 그리고 글방 책장에서 그때의 기사를 가제본해 놓은 '감동과 좌절, 150일의 기록'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때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의를 좇는 사람
나는 2002년 7월, <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가 된 이후 한동안 봇물이 터지듯 이틀에 한 꼭지 꼴로 매우 열심히 기사를 썼다.
연재기사 '눈의 나라 기타도호쿠'에 이어 '의를 좇는 사람'을 만들고는, 첫 기사로 고 박종철씨 아버지 박정기 선생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그 무렵 한 독자가 박정기 선생 다음 분으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 응징한 권중희 선생의 근황을 취재해주면 좋겠다는 제보를 내 메일로 보냈다. 나도 그분의 지난 일들을 익히 알고 궁금한 터인 데다가 나의 항일유적답사 안내를 해주신 이항증 선생과 권중희 선생은 같은 고향으로 잘 아는 사이라 권 선생과 쉽게 연결이 됐고 취재 수락도 쾌히 받았다.
2003년 10월 25일, 우리 세 사람은 내가 근무하던 학교(이대부고)에서 가까운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첫 상봉을 하였다.
나는 그날 취재 계획을 미리 세운 바, 첫 만남의 장소는 권중희 선생이 안두희를 응징하다가 징역형을 산 서대문 형무소로 잡았다.
그런 뒤,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시해한 경교장(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본관), 그리고 효창원의 백범 묘소로 장소를 옮겨가도록 세웠더니, 두 분 모두 아주 잘된 기획이라고 흔쾌히 따라 주셨다.
우리 일행은 택시로 세 곳을 다니며(세 사람 모두 승용차가 없음) 사진 촬영을 했다.
효창공원 부근 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취재를 하는데, 실내가 어수선해서 하는 수 없이 내 집으로 모셨다.
그날 저물도록 권중희 선생의 안두희 추적 응징사를 듣는데 매우 흥미진진하였다.
12년 동안 안두희를 추적했던 이야기가 끝났다. 그새 네댓 시간이 흘러갔다.
권중희 선생이 어찌나 실감나게 얘기하시는지 마치 007 시리즈를 한 편 본 듯했다.
나는 아무래도 한두 회 기사로는 그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할 것 같아 오마이뉴스 데스크에 하소연을 했다.
당시 정운현 편집국장은 아무리 좋은 인터뷰라도 2회를 넘기면 독자들이 식상해 하니 2회로 줄여 송고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건성으로 답하고는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첫 회 기사를 송고하였다.
데스크의 압력을 묵살하다
Ms(버금) 기사인데도 조회 수 7000을 거뜬히 넘겼다.
나는 데스크의 압력을 묵살하고, 연재를 계속 이어갔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댓글도 조회 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인터뷰 마지막 회인 8회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은 조회수가 2만을 넘었고 44개의 댓글이 달렸다.
연재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리자,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하여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계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라면서 그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왕복 비행기 삯과 체류비를 포함하여 2천~3천만 원 정도면 충분할 텐데 기업인들이 정치인에게는 사과상자에다 현찰로 수십억씩 갖다 바치지만, 자신 같은 이에게 백범 선생 암살 배후를 밝히라고 단돈 10만원이라도 주겠느냐면서 로또 복권이라도 한 번 사보고 싶다고 했다.
누리꾼의 댓글
이 기사가 나가자 아이디 '독야청청'이라는 누리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주셨다.
"박도기자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리고요, 나라를 위한 일인데 조금씩 모으면 삼천만원은 가능 하지 않을까요? 기자님께서 주도하시면 가능 할 것도 같은데… 한번 심사숙고하시길… 그럼 수고하세여."
그리고 조성준씨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댓글로 달아주셨다.
우리는 아직도 치욕스런 역사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권중희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자.
우리의 역사가 치욕스러운 것은 우리가 30여 년간 일제의 압박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해방 후 지금까지도 그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직도 치욕의 역사 속에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범법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조국 나는 그런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
권중희 선생을 위해 그가 우리의 치욕스런 역사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허망한 귀국행
그 댓글에 몇몇 누리꾼이 동의한다는 글을 실어주셨다. 이 댓글들이 계기가 되어 모금이 시작되었다.
모금 1주일 만에 1000만원이 모였고, 2주 만에 애초의 목표액 3000만원을 달성하여 마감하였다(총 4300여 만원 모금).
그해 연말까지 모금하려던 계획이 단 2주 만에 목표액을 초과한 것이었다. 대단한 열기였다.
마침내 권중희 선생과 나는 2004년 1월 31일 출국, LA를 경유해 미국 워싱턴 덜레스공항에 안착하여 2월 1일부터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재미 동포와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환영 나온 동포들에게 꽃다발을 받다.
하지만 우리는 곧 벽에 부딪쳤다.
▲ 동포 유학생 권헌열(오른쪽)씨가 NARA 마이클로필름에서 한국관련 문서를 검색하자 그 곁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설명해 주는 권중희 선생.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학예사 보이랜(Boylan) 씨에 따르면, 미국정부에서는 9·11 테러 사건과 노근리 사건 발표 뒤 대부분의 문서(97~98%)를 '파기(Destroyed)'했다고 하여 맥이 빠졌다.
조기 귀국이냐, 잔류냐 고심하다가 북데기에서 낱알을 찾듯이 애초 일정대로 눈에 핏발을 세웠지만 딱 부러지는 문서는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신의 평생소원이 물거품이 되자 권중희 선생은 "태평양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런 선생을 극구 만류하였다.
귀국한 뒤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강원 산골로 아주 내려오는 바람에 권중희 선생을 자주 만나 뵙지 못하다가 오늘 비보를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NARA 보이랜 방에서 자원봉사자 이도영, 보이랜, 이선옥 씨.
보이랜은 중요문서 대부분은 파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아키비스트 보이랜이 97~98%는 파기되었다고 쓴 글
지난 봄 한국전쟁 사진 자료 수집 차 워싱턴에 가, 당시 우리 일행을 도와준 동포와 유학생 주태상씨와 이선옥씨를 만났더니, 그들은 그새 부부가 되어 예쁜 딸을 데리고 나왔다.
이들 부부의 인연은 권중희 선생이 맺어준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면 저승에서 권 선생은 매우 기뻐하시리라.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고 권중희 선생에 대한 추억의 나래를 접는다.
▲ 귀국길 덜레스 공항 출국장에서. 권중희(가운데) 선생 좌우의 동포 유학생이 부부가 되었다.
권중희 선생, 아니 오마이뉴스 누리꾼이 맺어준 부부다
(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씨, 어린이는 권헌열 씨 아들).
▲ 귀국길 LA 동포들의 환영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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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56주기 추모 인터뷰]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씨 |
"우리 나라 독립의 화신이요, 국부(國父)이신 백범 선생을 시해한 그 자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다시는 이 땅의 교육이 안 되지요. 후손을 볼 낯이 없는 일이지요.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무렵 저는 천주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단죄하였습니다."
백범 선생 56돌 기일을 아흐레 앞둔 지난 6월 17일 오후 2시,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나무 그늘 의자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56·택시기사)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박기서씨는 지난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안두희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몽둥이로 절명시켰다.
백범 묘소, 여기만 오면 아주 편해요
올 봄 조문기 선생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씨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에게 안두희의 이 세상 마지막 모습과 그 뒷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 면담을 부탁드렸는데 박기서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서로 사는 곳이 멀고, 그는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어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 선생의 기일을 넘길 수 없어서 6월 17일로 어렵게 날짜를 잡았다. 우리는 효창원 백범 묘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지인과 점심을 나누면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 택시기사 박기서씨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사는 꼴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법치국가에서 개인이 사형으로 보복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와 헤어진 뒤 백범 묘소로 가기 위해 신촌에서 택시를 탔다. "효창동 백범묘소로 갑시다"라고 하자, 기사가 무슨 일로 거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는 박기서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안가지만(그 기사의 이름은 안 아무개였다) 그 놈을 제 명대로 못 살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지요.
안두희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면 이 땅에 정의와 양심은 모두 다 땅에 묻혔을 테지요.
같은 택시기사로 박기서씨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 분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합니다."
백범 묘소 앞에서 박기서씨를 만나 인사를 나눈 뒤 대담에 앞서 먼저 묘소에 참배코자 산소로 갔다. 내가 앞장서고 박기서씨가 뒤따랐다.
묘소 앞에 이러르자 박기서씨는 묘소 어귀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았다.
마치 당신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는양.
"여기만 오면 마음이 정화되고 아주 편해요." 절을 두 번 드리고 일어난 박기서씨의 첫 마디였다.
"제가 지난번 백범 선생 암살 배후 관련 기사를 연재할 때, 몇몇 네티즌들이 '박기서는 미 정보부 끄나풀이 아니냐?'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쪽의 사주를 받아서 안두희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고 저 세상으로 보낸 거 아니냐? 마치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를 다른 자객들이 죽여 버린 거나 아키노를 암살한 하수인들을 또 다른 총잡이들이 사살해 버린 거와 같이 말입니다."
기자의 말에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 백범 김구 선생 존영
"우와! 정말, 정반대 생각이네요. 야아 참, 안두희가 미국 정보부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이 왜곡된 데는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살려뒀다가 자연사하면 우리의 민족 정기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청소부 심정으로 안두희 '처단'했다"
- 안두희를 처단한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때 저는 버스기사였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일과를 마치는 시간은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입니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미리 준비해 둔 몽둥이를 품속에 넣고 안두희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 무렵이더군요.
안두희 처가 일찍 운동하러 간다기에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청 기다려도 아침 내내 문이 안 열려요. 그래서 틀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1시 무렵에야 문이 열려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두희 처가 슈퍼에 가려고 문을 따고 나왔다더군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두희 처를 밀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 안두희와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네가 백범 선생을 돌아가시게 한 안두희냐!'고 하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일어나서 노려보더라고요. '네가 백범 선생님을 암살했느냐?'라고 다시 다그치자 안두희가 뭐라고 말하는데 분명치가 않더군요.
사실 그때 나도 무척 흥분돼 있었기에 안두희의 말이 제대로 들릴 리도 없었지요.
'내가 오늘 너를 처단하러 왔다'고 하는데 안두희 처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 뒤를 쳐다 보더라구요.
▲ 안두희
그래서 뒤를 돌아봤더니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 그 순간 안두희가 어떻게 해 볼 양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안두희는 키도 크고 주먹도 크더라고요.
그의 덩치와 큰 손을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지고 저 손으로 백범 선생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생각이 들자 적개심이 불타오르더군요. 그래서 몽둥이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안두희 처가 말로 하지 사람을 치느냐고 달려들더라고요.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간 끈으로 안두희의 처 손을 묶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신도 다친다'고 위협한 뒤 다른 방으로 데려가자 안두희 처가 그제야 제 눈에서 살기를 눈치 채고는 벌벌 떨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다시 안두희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는 보이는 게 없었어요.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습니다. 애초부터 적당히 혼내줄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내려고 작정하고 갔었지요."
"백범 선생 살아계셨다면 6·25 일어나지 않았을 것"
- 그 뒤 안두희가 꿈에 보이거나 응징에 대한 죄의식은 없는지요?
"안두희가 나타난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요. 저도 피와 눈물이 있는 사람인데….
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안두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요.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6·25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단정'을 세웠던 이승만 일파가 백범 선생을 암살하자 민심이 7할 이상은 돌아 버린 거예요. 김일성이 그 반이(反李, 반이승만) 정서를 자기 지지로 오판하여 밀고 내려온 거지요. 또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백범 선생이 계셨더라면 아마 전선으로 달려가서 온몸으로 막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백범 선생을 깔아뭉개고 남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안두희와 그 일당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죄를 진 반역자들입니다."
▲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박기서씨
- 그 일로 형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살고 청주에서 6개월 정도 사는데 3·1절 특사로 풀어주더군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고요."
외람되지만 이는 마치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독립전사들이 감옥이나 형장에서 느끼는 행복과 같을 거라고 했다.
마침 가까운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원생들을 데리고 왔다. 언저리가 소란하여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묘소 언저리를 거닐었다.
▲ 백범 묘쇼 앞에 선 박기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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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안두희와 박기서 |
[한겨레]2006-10-24 01판 29면 1276자 사설 |
꼭 10년 전 일이다. 박기서는 안두희에게 물었다.
“네가 안두희냐?” 도피와 병마에 지친 늙은 안두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렸으나, 자신이 안두희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박기서는 ‘정의봉’을 꺼냈다.
순간 종교적인 번뇌가 스쳐갔다. 버스 운전으로 겨우 꾸려가는 가정형편과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결국 박기서는 정의봉을 휘둘렀다. 그는 ‘겨레와 조국에 죄를 지은 자가 하늘이 주는 수명을 다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정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안두희는 허망하고 처참하게 숨졌다. 1996년 10월23일이었다.
육군 소위이던 안두희는 1949년 6월26일 백범을 암살하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헌병 지프에 실려가서 무기형을 받았다.
그의 수감생활은 고기, 술, 담배가 원없이 제공되는 호화판이었다.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했고, 전역 후에는 검은 세력의 비호 아래 군납업에 손을 대 한때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만큼 큰돈을 만졌다.
자유당 붕괴 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부인과 위장이혼하고 가족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자신도 이민을 시도했다.
그는 백범 암살에 관한 일들에 대해 끝내 거짓과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다. 죽음은 종국에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안두희의 죽음은 극적 상징성을 띤다.
박기서는 성당에서 자수했다. 그리고 법이 정한 대로 형을 살고, 예전처럼 운전대를 잡고 살고 있다.
그가 그날 한 일을 두고 개인이 개인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가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저버리고, 개인적인 응징을 결심하고 실행할 때까지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그가 그날 한 일은 음모와 거짓과 침묵으로 점철된 거대한 악의 구조에 온몸을 던진 도전장이고, 불의에 면역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제발 진실을 향해 눈과 귀를 열라는 피맺힌 절규에 다름 아니다.
박기서가 안두희를 난생처음 만나고 영원히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은 여전히 완악하고 진실은 아직도 멀리 있다.
이제라도 백범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은폐했던 검은 세력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겨레의 자긍심을 살리는 일이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일이고, 또다른 박기서를 만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동/예원학교 국어교사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의 최대 실수 아름다운 청년 che*** /2009.02.18
노무현 전 대통령님!!
만약 님의 재직시절 백범 김구 선생님을 암살했던 안두희를 몽둥이로 척살한 버스기사 박기서 선생님이 분에게 국가에서 국가유공자로 훈장을 수여하고 포상을 했더라면..
지금 이 땅에서..안병직, 김진홍이와 같은 뉴라이트 친일파 무리들이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었을까요?
아마 언제, 어디서 각목맞고 뒈질지 몰라 감히 이 땅에서 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작자까지 일본에게 더 이상 종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
역사문제, 독도문제 거론하지 않겠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청계광장에서 있었던 용산학살 사망자 추모제.. 2차례에 걸쳐 뉴라이트 놈들이 추모제 지내는 현장 옆에서 맞불 집회를 하다가 유인물과 시위물품을 빼앗기고 시민들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고 쫒겨난 일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지휘하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뉴라이트 놈들이 나타났다"라는 소리를 듣고 분노,몰려간 시민들이 경찰조차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 쓰레기 매국노 놈들 감히 촛불시위대 근처에는 얼씬 거리지도 못하고 있네요....
이제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 땅에서 친일 매국노 무리들을 깨끗이 청소해 버릴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다시는 이런 쓰레기들이 이 땅에 발호하지 못하도록..
그 들의 후손들의 고위직에 오르고 배부르게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문득 만약에 그때 그랬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푸념 한 번 늘어놓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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