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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테마파크 2008. 8. 3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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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ㅣ 장준하

 

당당한 풍모, 탁월한 식견, 현하의 웅변을 겸비한 장준하는,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운동가였고,

순교자적인 희생정신으로 굴곡의 역사에 온몸을 던진 청빈한 정치가였다.

풍찬노숙의 삶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 '돌베개'를 기꺼이 베고자 했던 장준하의 일생이,

오랜 시간 장준하의 곁에서 호흡을 같이했던 저자의 글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장준하는 흙탕물 같은 우리 현대사의 연못에 핀 연꽃과도 같은 존재이다.

일제시대에는 20대의 젊은 나이로 광복군에 참여해 항일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사상계』를 창간하여 전쟁이 낳은 정신적 폐허 위에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여망을 일깨웠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붓을 꺾고 거리에 나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는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났다.

당당한 풍모, 탁월한 식견, 현하의 웅변을 겸비한 그는,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운동가였고,

순교자적인 희생정신으로 굴곡의 역사에 온몸을 던진 청빈한 정치가였다.

풍찬노숙의 삶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 '돌베개'를 기꺼이 베고자 했던 장준하의 일생이,

오랜 시간 장준하의 곁에서 호흡을 같이했던 저자의 글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장준하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최초의 전기

한국 현대사는 국민으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는 국가적인 지도자를 몇 사람 갖지 못했다.

분단과 전쟁, 쿠데타와 유신독재, 정치규제와 암살 등 잇단 격변과 혼란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성장할 풍토가 마련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도 장준하는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흔치 않은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또 그처럼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끼친 이도 드물 것이다.

이 책은 장준하가 타계한 지 2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출간된 장준하에 대한 최초의 전기이다.

그동안 그에 관한 책으로는 그의 자서전, 장준하 전집, 그리고 그의 지인들이 엮어낸 추모기념문집,

그리고 사계절에서 아동문고로 펴낸 위인전이 전부였다. 장준하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혹은 그 이름 석자만 겨우 알고 있을 젊은층들이 쉽게 접해볼 수 있는 책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자서전 『돌베개』를 통해 장준하의 생의 한 시기를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나마 그가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던 2년간의 시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 책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장준하라는 한 인물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를 온전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장준하가 생전에 남겼던 글과, 그와 교유했던 지인들의 저술과 글 그리고 생생한 증언들을 토대로

장준하의 일생을 매우 충실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한 전기이다.

장준하의 민족과 조국에 대한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 그리고 격변의 현대사를 헤쳐나가는

참지식인의 고뇌와 인간적인 모습 등이 매우 극적이면서도 디테일하게 서술되어 있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 한평생 저항과 투쟁의 삶으로 일관했던 한 지식인의 생애와 사상이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자유와 민권'의 비타협적 저항정신으로 일관한 삶

장준하(1918~1975)는 일제시대 때는 독립운동가였고,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사였으며 민중과 민족의 편에 선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위협과 탄압이 극심했던 엄혹한 시절 죽는 순간까지 민주주의와

통일에 관련된 글을 쓰고 강연을 했으며, 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에 거리낌없이 나섰다.

『사상계』를 창간해 이름 없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힘썼던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양심적 지식인의 전범', '타협을 모르는 외곬의 언론'이라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은 그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들이다.

장준하는 어린 시절 배일 사상가이자 민족주의자인 조부 장윤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부친 장석인 역시 3.1만세 운동 등과 관련되어 일경에 쫓기는 애국 인사였다.

그런 탓에 어렸을 때부터 민족과 조국에 대한 신념과 인식이 남달랐는데 이는 그가 신성중학교 시절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하는 계기가 된다.(본문 36쪽)

이 브나로드 운동의 참여를 통해 장준하는 일제 식민지라는 조국과 민족의 현실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된다.

이후 그는 신성중학교 5학년으로 재학하던 시절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장이욱 교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본문 58쪽)

그는 정주의 신안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도 과수원을 뒤엎어 새 학교 건물을 짓는 등 과감하고

저돌적인 행동과 추진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러한 일화를 통해 그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일관된 신념의 소유자였다는 것이 드러난다.(본문 69쪽)

또 쓰카다 부대에서 잔반거부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일본 군의관이 동상에 걸린 손가락을

마취도 하지 않고 찢을 때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을 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기도 했다.(본문 93쪽)

쓰카다 부대를 탈출하여 임시정부로 향하는 6천 리 대장정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중국 대륙의 폭염과 파촉령의 살인적인 혹한을 견디며 향했던 임시정부로의 6천 리 길은

조국 광복에의 염원과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의 투지가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

oss 훈련을 받고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하려고 대기하던 중 이범석(당시 정진대 총사령관)이

그의 국내 진입을 만류하고자 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작전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극비리의

위험한 작전이었는데 이때 그는 삭발까지 하며 그 작전을 수행하겠노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본문 180쪽)

해방 후 그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또 분단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월간 잡지 『사상계』를 창간한다.

그는 월간 『사상계』 창간을 통해 20세기 한국 지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53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탄생한 『사상계』는 "자유와 민권"을 기치로 한 비타협적인

저항정신과 도덕적 헌신성으로 당대 지식인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등대 구실을 했다.

그리고 그 『사상계』의 중심에는 장준하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8년 9월호에 실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함석헌의 글이 필화사건으로 비화하면서 『사상계』는 더욱 유명해졌다. 지식인들은

『사상계』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봤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얘기했다.

민주화를 위한 장준하의 투쟁은 유신시절인 1973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으로 승화되어

박정희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고 아홉차례의 옥고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독재의 칼바람이 기승을 부리던 1975년 산행 도중 발생한 그의 실족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출처 : 인물여행
글쓴이 : lovi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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