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철학.역사/철학·사상

<성호사설> 조선 중기 실학자 성호 이익

테마파크 2010. 7. 5. 02:04

 

 조선 중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성호사설’…장난삼아 썼다고?>

 

“이것은 늙은 성호 옹이 장난삼아 쓴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의 첫 문장이다.

폭정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실용적인 지식을 묶어놓은 책의 서문에 이익은 왜 이런 맥빠진(?) 문장을 적었을까?

 

17~18세기 조선은 잇단 전쟁과 내부 모순으로 무너져갔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역이 부과됐고 봄에 빌렸다 가을에 갚는 환곡은 국가 차원의 고리대금업으로 변질했다.

가혹한 세금과 군역에 시달린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인기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노비들처럼 세금을 피해 일부러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은 비판 불가능한 성역으로 받아들여졌고, 양반들은 글자 하나에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사회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출현했던 유학이 조선에서는 도리어 사회 혼란을 부채질했다. 

 

 

 

이익은 세상이 변하는 만큼 지식도, 경전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조적으로 유교 경전을 해석하는 분위기가 사회를 망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 또한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런 사회 분위기에 일침을 놓고자 했다. 농사를 짓다가 밥을 먹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적어놓은 40여년의 실용 지식을 묶은 <성호사설>의 서문에 “장난삼아 썼다”는 문장이 적힌 까닭이다.

 

이익과 같이 어떻게든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한 무리의 사상가이자 실천가들이 조선 중기에 등장한다.

이수광, 한백겸, 유몽인, 박제가, 정약용 등이 그들이다.

이들 실학자들은 지리와 농사, 경제, 의학, 건축, 상업 등 실용적인 지식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생각은 실천되지 못했지만, 동학농민혁명과 개화사상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했다.

자칫 먼 얘기일 수 있는 조선 중기 실학자 이야기를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썼다. 초등 고학년 이상 학생들에게 유익한 책이다.

 

 

한겨레 | 2010-03-26 오후 06:47:03 |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 원글보기

 

 


 

 

[만화로 보는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이익 - 성호사설

 

 

 

 

 

경향닷컴 | 2009-01-12-14:44:11 | 원글보기 

 

 


 

 

성호사설 (星湖僿說)

 

저자 : 이익(1681~1763)

 

성호는 그의 호이고 사설은 <자질구레한 말> 이라는 뜻으로 성호가 겸손한 마음에서 붙인 것이다.


흔히 백과사전류로 부류되는 <성호사설>일시적으로 저작된 것이 아니고, 40년 동안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수시로 기록해둔 것이다.
따라서 번잡하고 중복이 많은 이 방대한 책을 그의 제자 안정복이 잘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성호사설>이다.

평생을 야인으로 지낸 성호가 정치.경제.사회 등 국정전반에 걸쳐 재야에서 보내는 개혁의 메시지로, 그 성격과 영향에 있어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고염무가 지은 <일지록>에 견줄 만한 대저로 평가된다.

 

▶ 생애

 

중농주의 실학사상의 대가인 이익의 호는 성호, 본관은 경기도 여주.

대대로 높은 관직을 누리던 집안에서 태어나부친은 당시 언관의 총수였던 대사헌직에 있었다.

1680(숙종 6)에 서인들이 남인들을 몰아냈던 경신대출척 때 남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로 죄천되었다가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9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난 성호는 몸이 허약했고 뚜렸한 스승 없이 둘째형인 잠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살벌한 당쟁 속에서 노론에 밀려난 남인 가문에 태어났던 성호의 일생은 출발부터가 고난에 찬 것이었다.

25세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장에서 부정이 판치는 것을 보고 회시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다음해에 형인 잠이 장희빈을 옹호하다가 당쟁으로 희생되자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한다.

국가에서 몇번 벼슬을 하사했으나 거절하고 고향인 첨성리 (경기도 안산.현재는 아파트 단지)에 성호장을 짓고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사상은 권철신.안정복.이긍익.이중환.이기환.정약용 등에 계승되었다.

 

그가 65세 되던 해데 그의 학행을 높이 산 조정이 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끝내 야인으로 평생을 마쳤다.

이때문에 그는 만년에 심한 가난에 빠져 <<나의 궁핍과 기아가 날로 심하여 졸지에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저서로는 <성호집>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집속록> <사서삼경질서> 등이 있다.

 

실학과 이익의 사상

 

1. 실학사상

실학이란 조선후기 영.정조 때 일어난 학풍으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모순에 직면하여 현실개혁을 통해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회개혁사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건국과 함께 정책적으로 채택된 성리학의 자기반성과 그의 극복과정에서 나타난 발전적 국면이었다.

이러한 학문적 기풍은 주로 근기지방의 학자들에 의해 주로 일어났는데,청나라에서 수입된 고증학과 서학(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학문적 성향과 시기를 중심으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18세기 중반 이익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학파>.

유형원.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이 학파는 중농주의적 이장에서 토지. 조세. 교육. 과거. 군사제도의 개혁 등 각종제도개혁에 치중했다.

실학파의 비조인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토지의 균전론을 주장했고,이익은 <곽우록>에서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겸병을 막는 한전론을 주장했다.

이익은 17세기 이후에 그 폐단이 노정되기 시작한 화폐의 유통에 따른 서울의 상업 고리대자본이 농촌에 침투하여 농촌경제를 파탄시키고 이농을 촉진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또한 당시의 이앙법의 보급과 광작운동으로 부농의 출현과 소농민의 증가현상에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학설은 당시 성행하던 성리학의 비생산적인 관념론을 배격하고 당시의 정치경제적 현실개혁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뒤를 이어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다. 이들의 사상은 당시 별로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구한말의 애국계몽사상가와 국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 18세기 후반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학파>.

이 학파는 유수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으로 이어지는 중상주의적 입장에서 상공업의 진흥방안을 학자들 나름대로 제시했다.

 

(3)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실사구시학파>.

이학파는 경서및 금석.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했다.

 

2. 이익의 사상

많은 실학자 중에서도 이익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이. 유형원에서 비롯한 실학의 물결이 <성호>라는 호수로 모여 들었으며, 다시 이 호수는 여러 새 흐름의 연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역사학파의 안정복, 지리학의 윤동규, 이중환, 경학의 이병휴. 수학의 이가환, 그리고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의 경제학은 모두 그 연원을 성호에 두고 있다. 이렇듯 실학은 이익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익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했다.

불교와 선비의 무실한 학풍을 배격하고 수기치인의 학문을 강조했으며 자득을 강조했다.

 

(1)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는 중농사상에 입각한 한전론과 사농합일을 주장하여 각 농가에 영업전을 지급하되 매매는 금지하고,그밖의 토지에는 매매를 허락하여 토지소유의 평등을 이루고자 했다. 고리대와 화폐, 환곡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사창제도를 주장했다.

 

(2)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자주적 역사관과 실증성을 강조했다. 종래 중국중심의 화이관에서 벗어나 삼한 정통론을 주장하여 우리가 중국에 예속될 수 없음을 밝혔다. 또한 역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도 종래의 주관적인 태도를 벗어나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3) 정치적인 면에서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기본적으로는 덕치를 말하면서, 현실에 있어서는 제도.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쟁에 대한 폐단도 지적하여 당쟁은 양반수에 비해 관직수가 적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과거제도의 개선을 주장한다.

 

(4) 사회적인 측면에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라가 빈곤하고 농민이 피폐한 이유로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 게으름 승려. 기교(사치.미신) 등의 6가지를 들고 이것을 추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성호사설>의 내용


흔히 백과사전류로 분류되는
<성호사설>은 일시적으로 저작된 것이 아니고 40년 동안 생각나고 의심나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수시로 기록해둔 것으로, 번잡하고 중복이 많은 이 방대한 책을 그의 제자 안정복이 잘 정리하여 분량을 절반으로 줄여서 편찬했다.

이것이 <성호사설유선>이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성호사설>이다.

 

스스의 글을 간추리는 데 있어 신중을 기하는 안정복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상의하지 말고 수정하라고 하는 등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는 신뢰감을 보였고, 안정복과 같은 우수한 제자에 의해 <성호사설>의 간행을 보게 된 것을 기뻐했다.

이 책의 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곽우록>은 이 책의 요약이요 결론이다. 곽우록 이란 재야에 있느 평민은 국가의 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지만 국가의 정책이 잘못되면 직접 그 피해를 입기 때문에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분에 넘치는 안을 제시하는 천민의 걱정 이란 뜻이다.

 

<성호사설>이 백과사전적 성격을 가진 데 반해 <곽우록>은 국정 전 분야에 걸쳐 그 폐단과 구제책을 체계적으로 논한 탁견에 가득 찬 명저다. 내용은 경연.전론.균전론.붕당론.논과거지폐 등 19개 항목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온갖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본서는 모두 10, 5(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으로 총 305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천지문>은 천문.지리에 관한 서술로서 해와 달, 별들, 바람과 비, 이슬과 서리, 조수, 역법과 산맥 및 옛 국가의 강역에 관한 것으로 특히 서양기술의 정교성을 인식, 새로운 서양문물의 적극수용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지구가 등글다는 것과 단군과 기자조선의 강역이 요동지방까지 미쳤음을 논중하고,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다.

 

2.<만물문>은 생활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복식.음식.농상.가축.화초 및 화폐와 도량형,병기에 서양기기등에 관한 서술이다.

 

3.<인사문>은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학문과 사상,인물과 사건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노비제도 및 서얼차별제도의 폐지,과거제도의 개선,고리대의 근원인 화폐제도의 폐지등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적.개혁적 내용을 담고 있다.

 

4.<경사문> <육경사서>와 중국.한국역사서를 읽으면서 잘못 해석된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그리고 역사사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붙인 사론이 실려 있다.

 

5.<시문문>은 중국과 한국 역대문인의 시문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다.

 

<성호사설>에 나타나는 그의 전반적인 사상은 성호의 사상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그가 유난히 강조했던 당쟁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를 <곽우록 붕당론>에서 살펴본다.

 

당쟁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권을 장악한 이조 전랑의 권한이 너무 커서 이 요직을 둘러싼 싸움이 불씨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주자학의 성격이 명분 실리를 내세워 남의 부정을 가려내는 데 준엄하여 융합의 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등 다채롭다.심지어 일인 어용학자들은 우리의 고유한 민족성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성호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당파는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에서 생기니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진다.

가령 열 사람이 모두 굶고 있는데 한상의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고 하자. 밥도 다 먹기 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며, 왜 싸우느냐고 하면 건방졌다거나 손을 쳤다거니, 말이 불손했다거니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람은 싸움이 말이나 손짓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나 실상 문제는 밥에 있는 것이다. 가령 그럴 때 여러 사람에게 각기 한 상씩 각 상을 차려주면 의좋게 먹을 것이 아닌가.

요는 배고픈 사람은 많고 밥은 한 그릇밖에 없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싸움은 가지각색의 구실과 더불어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당쟁의 시초는 한 사람의 선악, 한각지 일의 처리를 가지고 논하는 데서 비롯하여 당파가 대치하여 혈전을 벌이게 된다.

지금 정부에서 백관을 모아 인물이나 일의 시비를 묻는다면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백출할 것이되 당파로 배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당파가 생기는가
?
 그 원인은

1. 과거를 너무 자주 보아 많은 사람을 급제시킨 것.

2. 벼슬에 오른 다음 인사처리에 있어 일정한 원칙이 없이 정실에 좌우되어 함부로 진퇴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과거라는 것은 나라가 선비를 찾는 것이 아니고 선비가 벼슬을 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 이외에도 조상의 덕으로 관직에 오르는 사람도 있어 벼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없이 많은데 벼슬자리가 적고 보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사람을 자꾸 바꾸어 번갈아 벼슬하게 했고 그결과 좋은 자리에서 좌천되거나 또는 관직에서 파직되면 여기에 불만과 원망이 싹트게 마련이다.

 

중국에도 당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이 2백여 년간에 걸쳐 갈수록 격화된 나라는 없다.

선조 이래 당파가 둘로 갈리더니 둘이 넷이 되고 넷이 다시 여덟이 되어 서로 역적으로 모함하는 혈전을 벌인 끝인 원한이 누적, 세습되고 한 조정에서 벼슬하고 한 동리에서 살아고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도,혼인도 하지 않는다.

 

당파가 이렇게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너무 많은 급제자를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해진 관직은 정승 3에 판서가 6이요 기타 벼슬도 한정되어 있으니 벼슬자리는 모자라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당파는 새로운 내분이 생긴다. 일단 당파가 갈리면 당인의 눈에는 자파의 이익만 있고 국리민복은 생각할 여유가 없으며, 당파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 죽는 자를 명절로 치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는 자는 못났다고 하니 당쟁의 형세는 더욱 치열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1. 과거의 횟수를 줄이고,

2. 근무성적을 참작하여 무능한 자를 도태시키고 승진을 신중히 할 것.

3. 요직은 신중히 맡기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오래 유임시키고 각자의 본분을 지키도록 할 것 등을 주장했다.

 

 

성호사상의 의의


<
성호사설>에 담긴 이익의 사상은 흔히 거대한 호수에 비유된다.
성호의 학문은 유학에 기초를 두면서도 교조적인 주자학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학문이 현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익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 붕당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을 표명했고, 그 원인에 대해 양반수와 관직수의 개념을 도입하여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양반과 노비 등 신분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신이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는 조금도 당파성이 없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논하고 있다.

그의 붕당론은 어릴 때부터 골똘하게 생각해온 당쟁관의 총결산이며당파를 초월하는 그의 양식과 우국심의 발로이자 실학정신의 정형이다.

 

당시의 지식인은 관념의 세계에 빠지곤 했으나 성호는 평생을 농민과 함께 가난하게 생활했기때문에 누구보다도 농촌의 현실과 봉건제도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 고리로서 토지문제 등 당면과제를 중심으로 전개했으나 그의 적극적이며 계몽적인 개혁사상은 정부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천수를 누리는 중에도 가난 속에 살았지만 많은 제자를 기르고 방대한 저술을 남겨 우리 역사에 한 줄기 서광을 남겼다.

그의 80평생은 당대에 온갖 영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값지고 귀중한 것이었다.

그의 제세의 탁견은 살아서 햇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민폐를 구하기 위한 실제적인 의견 및 모든 사회적 모순의 근본원인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규명, 지적한 것을 볼 때 이익이야말로 보기 드문 석학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다만 그의 개혁이론이 봉건체제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의 한계를 지적받기도 하나, 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닭보다도 못한 정당>

 

닭은 먹이를 찾노라고 다투며 쏘다닌다.

때로는 상이나 의자에 마구 몰려들기도 하고, 때로는 지팡이와 신발을 더럽히기도 한다. 몰아내 보지만, 그때뿐이다.

화가 나서 지팡이를 휘둘러본다. 간혹 맞아 다치는 닭도 있지만, 맞을 때 아픔은 잠깐이고 모이가 더 좋기에 다시 몰려든다.

쫓아보지만 물러가는 척하다가 다시 또 몰려든다. 성호의 「닭을 길러보고 당쟁의 이치를 알다(祝鷄知偏黨)」(6권)의 첫 부분이다.

성호는 닭의 행태를 보고 거기서 당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최근 『정조실록』을 통독할 기회가 있었다. 상대 당파 아무개의 이름을 들면서 역적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으라는 얘기가 없는 날이 없다. 우국충정이 넘친다. 당쟁을 이끌었던 당파의 맹장들이 쓴 글을 보면 정말 논리정연하고, 또 거기에 동원된 고전과 수사는 입을 다물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상대 당파의 사람을 내쫓고 죽이라는 주문이다. 유가의 고전이 살인의 언어로 전용된 것이다. 이렇듯 잔혹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호는 말한다.

 

당파가 싸우는 것은 벼슬과 녹봉 때문이다.

때로는 혹 죄를 얻는 자도 있다. 죄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오직 바라는 것이 벼슬이기 때문에, 벼슬 얻는 것을 도리어 무겁게 여기고 죄를 짓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만약 벼슬을 끝내 더 얻지 못할 것을 안다면, 비록 죄가 가볍다 하더라도 반드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후세 풍속은 대개 자벌레가 몸을 굽혔다가 펼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정말 죄를 지어도 복(벼슬)만 얻을 수 있다면 죽고 죽이는 것 외에는 무슨 일이든 달가운 마음으로 해치우는 데 골몰한다.

 

성호는 단정한다. 어떤 당파에 빠지는 것은, 오로지 벼슬과 녹봉, 곧 권력과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이라고.


당파가 상쟁하는 과정에서 패배할 경우 매를 맞고 귀양을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아니,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꺼리지 않는다. 관직에 대한 욕망이 그 고통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성호는 죄를 지어도 벼슬만 얻을 수 있다면, ‘죽이고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 조차 성호의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왜냐? 당쟁은 숱한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상소문을 올리고 상대방을 탄핵하며 관직을 향해 몰려드는 인간의 모습은 모이를 향해 몰려드는 닭과 같다.

 

 

YES 블로그 | 2010-06-24 12:16 | 원글보기

 

 


 

 

성호사설 제13권 인사문(人事門) 백의유령(白衣踰嶺)입니다.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嶺南之俗 崇儒重道 故尊賢成俗 前朝崔文昌 薛弘儒 安文成 鄭文忠 皆嶺南人

영남의 풍속이 선비를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현인을 존숭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

전조(前朝)의 최 문창(崔文昌 문창(文昌)은 최치원(崔致遠)의 시호)ㆍ설홍유(薛弘儒 홍유(弘儒)는 설총(薛聰)의 시호)ㆍ안문성(安文成 문성(文成)은 안향(安珦)의 시호)ㆍ정문충(鄭文忠 문충(文忠)은 정몽주(鄭夢周)의 시호)이 모두 영남 사람이다.


入聖朝 吉冶隱遊於牧 圃之門

성조(聖朝)에 들어와서 길야은(吉冶隱 야은(冶隱)은 길재(吉再)의 호)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ㆍ포은(圃隱 정몽주의 호)의 문하에 놀았고,


至金司藝叔滋 受業於冶隱 而金寒暄 鄭一蠹 皆學於司藝之子金佔畢

김사예(金司藝 김숙자의 관직명) 숙자(叔滋)에 이르러 야은에게 수업하였으며 김한훤(金寒暄 한훤(寒暄)은 김굉필(金宏弼)의 호)ㆍ정일두(鄭一蠹 일두(一蠹)는 정여창(鄭汝昌)의 호)가 모두 사예(司藝)의 아들 김점필(金佔畢 점필(佔畢)은 김종직(金宗直)의 호)에게 배웠는데,


至李晦霽 李退溪而斯文大闡 皆嶺外世家 聖廟從祀者七人也

이회재(李晦齋 회재(晦齋)는 이언적(李彦迪)의 호)ㆍ이퇴계(李退溪 퇴계(退溪)는 이황(李滉)의 호)에 이르러 사문(斯文)이 크게 천명(闡明)되었으니, 모두 영남의 세가(世家)이고 성묘(聖廟)에 종사(從祀)된 이도 영남에서 7인이나 된다.


自圃隱死於忠 冶隱不仕而退

포은(圃隱)은 나라에 충성하다 죽었고, 야은(冶隱)은 벼슬하지 않고 물러갔으며,


寒 蠹二公 亦同時罹禍 退溪懲於己卯禍 難進易退 無意於仕宦 或不得已而暫出 職遞便催歸

한훤(寒暄)ㆍ일두(一蠹) 두 공(公)도 다 동시에 화를 입었다. 퇴계(退溪)는 기묘사화에 징계하여 나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며, 벼슬에 뜻이 없었다. 혹 부득이하여 잠깐 나가더라도 관직이 체임되면 곧 발길을 재촉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丁卯國恤 山陵未及而俄遞宗伯

정묘년 국휼(國恤)에 산릉(山陵)에도 못 미쳐 가서 예조 판서가 체임되자


於是起秸 未嘗數日淹也

이에 곧 길을 떠났고 수일도 머무르지 않았다.


由是 成俗至今出身者 以白衣踰嶺爲深恥 亦以罷官不卽還爲羞辱

이것으로 풍속이 이루어져서 지금 세상에도 출신한 자가 백의로 영(嶺)을 넘는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파직을 당하고 곧 돌아가지 않는 것을 수욕으로 여기니,


大賢一動靜 關係風化如此也

대현(大賢)의 일동 일정이 풍화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다.


近世朝論 幾於廢斥 然猶持循不改 讀書談道 知忠孝之爲可貴 他日國家 多事必有賴焉

근세에 조정 의논이 거의 폐척(廢斥)하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옛풍속을 고치지 않고 글을 읽고 도를 말하며 충효(忠孝)가 귀한 것을 아니, 다른 날 국가에 일이 많으면 반드시 힘입는 것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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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성호사설 경상도,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에서 경상도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경상도를 이렇게 말한다

 

"경상도인은 권세를 무한히 추종하고 아부하므로 능히 밑에 두고 부릴만하다....

허나 일단 스스로 권세를 쥐면 무한히 그 힘을 휘둘러 무릇 뭍사람을  번민케 한다....

입으로는 옳은말 만 하면서도 뒷전으로는 온갖 못된 짓을 먼저 하며...

입으로는 대의와 도리를 부르짖으며 뒷전으로는 스스로의 사사로운 이득과 안위 챙길 궁리를 하니 자못 가증스러운 데가 있다.....

성정이 포악하여 함부로 사람의 수족의 다침을 예사로 안다.....

소매를 나누어 헤어질 때는 반드시 해악을 입히고 떠나가니...

평소에 멀리함이 가한무리라 할것이로다....."

 

[출처] 성호사설 경상도 인물평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경상도를 이렇게 말한다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에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보전된다"....(충무공 난중일기中에서)....

 

慶尙徒 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怯奸又諶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경상도놈들은 무리를 지어 머리를 깎고 왜옷을 입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전라지방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왜적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노인 어린이 부녀자의 머리를 베어 왜의 장수에게 진상하기도 한다....) [난중일기]


[출처] 난중일기에서 경상도 인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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